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冷雪牽冰合 찬 눈은 얼음과 뒤섞이고
寒風擘地裂 찬바람은 땅이 찢어져라 부는구나
巨海凍墁壇 넓디넓은 바다는 얼어 단을 펼쳐 놓았고
江河凌崖齧 강물은 제멋대로 강기슭을 물어뜯는다
龍門絶瀑布 용문에는 폭포마저 끊기고
井口盤蛇結 우물 아가리는 뱀이 도사린 듯 얼어붙었다
伴火上陔歌 불을 들고 층층이 올라가 노래 부르지만
焉能度播密 어떻게 파밀(파미르 고원)을 넘어갈까?



, 얼음, 땅을 찢을 듯 부는 거센 바람, 제멋대로 강기슭을 물어뜯는 강물, 얼어 끊긴 폭포, 도사린 뱀 모양으로 얼음이 맺혀 버린 우물 아가리, 그리고 어두운 길 밝히려 불을 들고 한 층 한 층 오르고 또 올라 만나는 파미르... 어때요, 쩡한지요? 매콤한지요?

위 시는 혜초
(慧超, 704~787[추정])가 자신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안에 남긴 시입니다.
시가 시작되기 바로 앞에는 겨울, 토화라에서 눈을 만난 소회를 오언시로 쓰다[冬日在吐火羅, 逢雪述懷, 五言]”라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한마디가 붙어 있습니다.

토화라(吐火羅, 토카리스탄)는 오늘날의 러시아와 파키스탄 접경에 자리한, 동으로 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 고원을 바라보는 곳입니다.

겨울, 토화라에서...”에 이끌려 이윽고 시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사이에, 8세기 당제국과 인도 사이의 바닷길이 떠오르고,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고원이 떠오르고,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 접경의 황무지가 떠오르고, 로켓포 포탄에 무너져 내린 바미얀 석불이 떠오르고(혜초는 카불과 바미얀도 들렀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자연 앞에 선 한 사람의 심정도 삼삼합니다. 다시 시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사진_<왕오천축국전> 현존 원문의 영인본 재촬영. 오른쪽 둘째 줄에
"冬日在吐火羅..." 구절이 보인다.]
 

冷雪牽冰合  (찬 눈은 얼음과 뒤섞이고)

지금 혜초가 머물고 있는 토화라, 곧 오늘날의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 접경에 자리한 토카리스탄은 춥디춥고, 바람 많은 산악의 황무지입니다.
겨울 어느 날, 이 토화라에 눈이 내리는데 얼마나 춥고 바람이 거센지 그 차디찬 눈이 쌓인 위로 드문드문 얼음이 듣기도 합니다.
혜초는 이를 "冷雪牽冰合"이라 포착한 것입니다. 견 "牽" 에는 "끌어당기다"의 뜻이 있는데요, 직역하면 “찬 눈이 얼음을 끌어[牽] 모으다[合]”쯤이 되겠지요. 눈이 씨가 되어, 눈 사이로 결빙하는 모습에서 추위가 느껴지고 읽는 이의 가슴까지 절로 싸늘해집니다.


寒風擘地裂 (찬 바람은 땅이 찢어져라 부는구나)

―눈뿐입니까. 찬바람은 땅이 찢어져라 불어 지나갑니다. “벽擘”은 “가르다” “쪼개다”의 뜻이며 “렬裂” 또한 “찢어지다”입니다. 지면을 패며 지나가는 무서운 바람이 차기도 합니다. 결빙에 이어, 오소소 소름 돋게 하는 한 구절입니다.

巨海凍墁壇 (넓디 넓은 바다는 얼어 단壇을 펼쳐 놓았고)


―거해? 이곳은 오늘날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의 접경, 곧 내륙 중에서도 내륙입니다. 바다라니요. 예, 실제 바다가 아니라, 바다와 같이 펼쳐진 고원의 지형을 빗댄 표현이지요. 바다와 같은, 평평하니 넓디넓게 펼쳐진 지형이 저 너머로, 저저 너머로 끝없이 얼어붙은 것입니다. “만墁”에는 “흙손”이란 뜻이 있고, “(흙손질하듯)바르다”라는 뜻으로 연역됩니다. “단壇”은 주변보다 높이 쌓은 시설을 두루 일컫는 말이지요. “단상” “교단” 따위를 떠올려 보세요. 곧 바다와 같은 고원 지대가 얼어붙은 모습이, 마치 단을 깔아놓은 듯 전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江河凌崖齧 (강물은 제멋대로 강기슭을 물어뜯는다)

-이 구절도 운동감도 생생합니다. 중아아시아의 고원은 홑으로 비죽이 서 있지는 않습니다.
이곳 고원은 협곡을 끼게 마련이고, 협곡을 흐르는 물은 평지보다 험한 강기슭을 지나게 마련입니다.
“릉凌”은 “깔보다” “범하다” “능가하다”의 뜻입니다. 문맥에 따라 “제멋대로” “함부로” “마구” 들로 새길 수 있습니다.
“애崖”는 “벼랑”이란 뜻이며 “애涯”와 통용해서는 “물가” “강기슭”의 뜻도 있습니다. “설齧”은 그야말로 “물어뜯”고 “갉아먹”는 것입니다.

얼어붙은 저 너머를 바라보던 시선을 문득 아래로 떨굽니다. 한겨울 날씨 사납고, 그에 장단을 맞춰 벼랑 아래를 지나가는 강물도 사납습니다. 얼마나 사나운지 강기슭을 아예 물어뜯을 듯 마구잡이로 솟구쳤다 떨어집니다. 강기슭을 제멋대로 덥석 베어 무는 강물. 이렇게 “릉凌”과 “설齧”으로 드러낸 운동감은 그것을 본 적 없는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현장감과 잇닿아 있지 않을까요.

龍門絶瀑布(용문에는 폭포마저 끊기고)


―용문. 중국의 험한 지명의 대명사입니다. “등용문登龍門”이란 말도 있잖아요. 물고기가 여길 넘으면 용이 되고 못 넘으면 죽지요. 용문처럼 험한 지대에 자리한 폭포의 흐름이, 지금은 맵고 사나운 날씨에 얼어 끊어졌습니다.

 井口盤蛇結 (우물 아가리는 뱀이 도사린 듯 얼어붙었다)  


―앞서 바다와 같은 고원 지대를 바라보던 시선을 벼랑 아래로 떨어뜨렸던 혜초는, 이번에는 험하디험한 지형 어느 곳의 끊어진 폭포를 바라보다 문득 우물에 눈이 갑니다. 그 우물 아가리라고 별 수 있습니까. 얼어붙었습니다. 도사리고 앉아 있는 뱀[盤蛇]처럼 얼어붙었습니다[結].

 伴火上陔歌 (불을 들고 층층이 올라가 노래 부르지만)


―혜초는 지금 토화라에 있습니다. 여기서 시작해 힌두쿠시 산맥을 돌파하고 파미르를 건너야, 자신의 스승과 동문이 있으며 자신에게 여행증명서를 발급해 준 당제국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4년 구법 여행의 대미가 한층 가까워진 셈입니다.

사나운 날씨, 험한 자연은 나그네의 감상을 더하고, 혜초는 어느새 가슴이 터질 지경이 되었을 테지요. 아니 가슴이 터졌습니다. 터졌기에 이렇게 노래[歌]를 부르고 있잖아요..

“반伴” “짝” “반려자”의 뜻입니다. “화火”는 어두운 길을 밝힐 조명입니다. 험한 길에 벗 삼을 이도 없습니다. 여기까지 한 층 한 층 힘겹게 올라온 길도 그랬지만, 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까지 갈 길도 한 층 한 층 힘겹게 또 그저 불 하나 들고 조심조심 가야 합니다. “층계”를 뜻하는 “해陔”가 그 ‘한 층 한 층’ ‘층층이’ 오르는 힘겹고도 조심스런 길을 드러냅니다.

  焉能度播密 (어떻게 파밀(파미르 고원)을 넘어갈까?)


―와락 터진 노래, 이제 여며야죠. 이제 곧 건너야 할 파밀播密, 곧 파미르. 그곳을 바라 가슴 깊은 데서 터져 나온 노래를 불러 봅니다만 한구석의 불안은 어쩔 수 없습니다.
“언焉”, 반문(반어문)을 이끄는 부사입니다. 문맥에 따라 “what~?!”을 살짝 넣어 독해해도 좋습니다. “언焉”으로 해서, 토화라에서 부른 혜초의 노래, 그 마지막 구절의 속뜻은 “어떻게 파밀을 건널 수 있을까?” “과연 파밀을 건널 수 있을까?”에 걸치게 되었습니다.

<왕오천축국전>에는 이 시를 포함해 모두 다섯 수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다섯 수 모두 여행기 서술과 구성의 매듭 역할을 하면서 나그네의 깊은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겨울 핑계가 있기에 이 쩡하면서도 매콤한 시부터 보셨습니다만, 앞으로 간략한 <왕오천축국전> 해제와 함께 나머지 네 수도 마저 소개할까 합니다.
구도를 향한 의지, 목숨을 건 행위였던 여행에서 얻은 감상, 난생처음 접한 자연과 문명에 대한 놀라움 들을 솔직하게 드러낸 시를 혼자 읽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11월입니다.


[사진_최남선의 <왕오천축국전> 해제(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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