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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껏 소리 지르기, 아픈지 안 아픈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박수 치기, 마음속 조마조마를 응축할 대로 응축했다가 하단전의 숨을 한순간에 휘발시키는 득의의 또는 아쉬움의 감탄사 내뱉기... 지독히 역동적이며 도회적이며 그동안 없었던 이 휴식 방법은 격투 이상으로 사람의 야성을 건드릴 수도 있다. 드라마 이상으로 사람을 빨아들일 수도 있다. 예컨대 아래 링크를 따라가면 나오는 시에서 보듯, <그날이 오면>의 시인 심훈의 가슴은 야구 앞에서 이렇게 일렁이기도 했다.

http://theturnofthescrew.khan.kr/46

한민족에게, 하기와 보기 두 측면에서 너무나도 새로운 이 행위는, “문명개화”의 시대에 바다 건너에서 새로이 들어왔다.
베이스볼baseball. 각각 아홉 명이 두 패로 나눠 아홉 회 동안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하는 운동 경기. 이 경기의 직계 조상이 영국인들의 크리켓인지, 미국인 더블데이(A. Doubleday)가 확정한 19세기의 베이스볼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한중일을 타고 넘은 베이스볼의 한자어 번역을 파자하면 그 내력이 이렇다.



*사진_여명기의 한국 야구사를 소재로 한 영화 <YMCA야구단>의 홍보용 컷에서
  

베이스볼을 접한 조선인들이 이 행위에 처음에 붙인 말은 타격에 착안한 “타구打球” 또는 “격구擊球”였다. 중국인들은 같은 행위를 보고도 하필 방망이에 착안해 “봉구棒球”라 불렀다. 그리고 오늘날, 대륙에서나 대만에서나 베이스볼은 “봉구”다. 여기서 중국어 초심자를 위한 팁 하나! MLB(미국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의 현대 중국어 간체자 표기는 “全美职业棒球大联盟”, 곧 “전미직업봉구대연맹全美職業棒球大聯盟”이다.
일본인은 어땠는가. 일본인들은 평평하고 탁 트인 공간을 필요로 하는 운동 경기라는 데 착안해, 이 행위를 “야구野球”라 했다. 한편 조선인 재일유학생들은 손에 전용 장갑을 낀데다, 손으로 공을 주고받는 행위에 착안해 “수구手球”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하나 조선 사람들에게도 일본어 어휘 “야구”가 완전히 침투해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지난날의 조일은 물론 오늘날의 한일도 “야구”를 공유하고 있다.
한국어 “야구”든 중국어 “빵키우棒球”든 일본어 “야큐野球”든, 아무튼 이 운동 경기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조선을 사로잡았다. 적어도 19세기 말에는 인천항에 정박한 미국 선박의 선원을 통해 조선인들에게 소개된 것으로 추정되는 야구는, 20세기 초에는 황성기독청년회YMCA를 통해 본격적으로 조선 사람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한다.

조선에서 야구의 기세는 놀라웠다. 1905년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가 황성기독교청년회 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이후, 점차 관립 학교를 중심으로 야구단이 생겨남과 함께 대중에게 공개되는 야구 경기도 늘어나기 시작한다. 이후 몇 해 지나지 않아 1909년에는 동경유학생 대 재조선 선교사간 야구 경기가 성대하게 벌어져 대중적 인기를 더욱 확산했고, 1910년대 한성외국어학교• 동경유학생회•대한의원부속학교•한성고등보통학교•휘문의숙 들이 잇달아 야구단을 창설하는 데 이른다. 그리고 1920년 7월 조선체육회가 창립된 뒤, 같은 해 11월 드디어 제1회전조선야구대회가 개최되었다.

1920년대 조선 야구사의 흐름에는 눈여겨볼 구석이 많다. 1920년대 조선 야구는 빠르고 조직적으로, 몹시 “스마트”하게 움직였다.
예컨대 MLB 야구와 조선은 이미 1922년에 만났다. 야구 선수 출신이자, 제1회전조선야구대회의 심판이자, 스포츠용품을 취급한 상인이자, 조선체육회 조직의 핵심인사이자, 스포츠저널리즘에 일찍이 눈뜬 걸출한 체육인 이원용이 1922년 일본 방문 친선 경기를 치른 메이저 리그 올스타팀의 조선 방문을 성사시킨 것이다. 조선에 온 메이저 리그 올스타팀은 전조선군(全朝鮮軍, “조선의 올스타”라는 의미)과 경기를 치렀고, 이때 전조선군은 21 대 3으로 대패했다. 하나 세계 최고 수준의 경기력과 직접 대면한 의의만큼은 결코 적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야구 발전을 위한 노력은 일회성 행사로 그치지 않았다. 조선 야구계는 1925년에는 시카고대학 팀과 미국여자야구단을 초청해 경기를 여는 등 보급과 흥행 양쪽을 꾸준히 다져나갔다. 그 덕분인지 야구는 1920년대 조선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자리를 잡는다. 예컨대 당시 언론이 말하는 조선 야구의 현황은 “팀 수 400여 개, 8면짜리 신문에서 1개 면을 야구에 할애, 매경기 관중 수는 2000〜3000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 기세는 새로이 열린 건축 공간에서도 불타올랐다. 1925년 10월 10월, 우리 건축사상 최초의 스포츠 전용 공간으로 태어난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스포츠가 바로 야구였다. 방송에서도 야구는 “최초”를 기록한다. 1927년 갓 개국한 경성방송은 경성실업야구연맹전의 경기를 라디오로 실황으로 중계했는데 이것이 한국 스포츠사상 최초의 실황 중계방송인 것이다. 그리고 1920년대를 관통한 노력은, 1930년 9월 야구심판협회를 조직함으로써 정점에 이른다. “매경기 관중 수 2000~3000명”도 대단하지만, “심판”과 “협회”를 챙긴 조선 야구계의 마음과 지각에는 문득 존경심마저 피어오른다.

물론 중일전쟁 발발과 확전 이후에는, 조선의 모든 부문이 그랬듯 야구 또한 안타까운 침체를 면할 길 없었다. 이제 조선이 아닌 한국 야구사의 여명은 해방과 함께 왔다. 중간에 침잠의 시기가 있었을지언정, 야구는, 한 분야의 발전을 위해 또 한 분야가 내실을 다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며 “스마트”하게 움직인 경험이 있다. 이런 경험이야말로 오늘의 한국 야구를 격려하고 격발할 만한 한국 야구사의 자산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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