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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외교 사절의 비공식 수행원 자격으로 청제국을 여행한 연암이 그 여행기 <<열하일기>>를 남긴 경위는 앞서 본 대로다.

http://theturnofthescrew.khan.kr/64 참조.

이 여행에서 연암은 현대의 산책자-관찰자의 면모를 여실히 발휘했다. 연암의 눈은 열하의 계엄 상황, 몽골 및 티베트 대 청제국 사이의 긴장, 건륭제와 판첸라마의 회동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 또는 사태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염집, 술집, 전당포, 외양간, 거름 더미, 수레, 복식, 시장, 길바닥 인심 등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에 가 닿았다.


그는 현대의 도시 산책자 발터 벤야민처럼 청제국을 누볐고, 기록광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폴 스미스처럼 끝없이 비망록을 챙겼다. 이런 관찰과 기록을 근거로 해서 연암은 청제국 문물의 특징과 본질을 “
대규모大規模, 세심법細心法”으로 요약했다. 여기서 “대규모”란 청제국 문명, 문물, 재부, 제도의 현황이 보는 이를 압도할 만큼 대단하다는 뜻이다. “세심법”이란 청제국이 그 대단한 규모를 작동하고 유지하는 원리의 기본은 일상의 작은 일 하나에도 소홀함 없는 섬세한 마음씀씀이라는 뜻이다.

 

대규모와 세심법을 한껏 호흡한 여행꾼의 손에서 나온 덕분일까. <<열하일기>> 또한 청제국 못잖은 대규모와 세심법을 아울러 갖춘, 크고도 섬세한 문서다. 그리고 규모와 섬세함을 겸전한 매력이 워낙 강렬해서 오늘날의 많은 독자들이 “연암 곧 <<열하일기>>” “<<열하일기>> 곧 연암”이라는 상을 품기도 한다. 그런데 연암의 글은, 하나 마나 한 소리지만, <<열하일기>> 하나뿐이 아니다. 청제국 여행 전에, 연암은 이미 스스로 대규모와 세심법을 아우른 원고를 이루고 있었다.

 

글쓰기에서 이룬 대단한 규모의 세심한 마음씀씀이가 청제국 여행을 통해 다시 한 번 화려하기 그지없이 만개했다고 하면, 글쎄, 내 생각에도 참 마침맞은 설명이 될 듯하다.

그런 생각의 연장이다. 서가에 <<열하일기>>를 정리하다 문득 <<연암집>>의 꼭지, <연상각선본> <공작관문고> <영대정잡영> <영대정잉묵> <서이방익사> <종북소선> <방경각외전> <고반당비장> <엄화계수일> 들이 새삼스레 경경하다. 경경한 만큼 또 다른 연암을 한 번 되돌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난다. 그러면서 편 데가 마침 <맏누님 증 정부인 박씨 묘지명[伯姊贈貞夫人朴氏墓誌銘]>이다.
 


1771년, 조선 영조 47년 연암의 맏누님이 향년 43세로 세상을 떠난다. 당시 34세였던 연암은 맏누님의 죽음에 부친 묘지墓誌와 명문銘文(명문은 칠언절구로 갈음하는 파격을 시도함)에 가족의 정과 곡진한 애도의 뜻을 담았는데 다음과 같다. 짧은 글이므로 원문을 먼저 제시하고 나서 번역문을 제시한다.
 

孺人諱某. 潘南朴氏. 其弟趾源仲美誌之曰:
孺人十六. 歸德水李宅模伯揆. 有一女二男. 辛卯九月一日歿. 得年四十三. 夫之先山曰鵶谷. 將葬于庚坐之兆. 伯揆旣喪其賢室. 貧無以爲生. 挈其穉弱婢指十. 鼎鎗箱簏. 浮江入峽. 與喪俱發. 仲美曉送之斗浦舟中慟哭而返. 嗟乎. 姊氏新嫁. 曉粧如昨日. 余時方八歲. 嬌臥馬전[馬+展]效婿語. 口吃鄭重. 姊氏羞. 墮梳觸額. 余怒啼. 以墨和粉. 以唾漫鏡. 姊氏出玉鴨金蜂. 賂我止啼. 至今二十八年矣. 立馬江上. 遙見丹旐翩然. 檣影逶迤. 至岸轉樹隱. 不可復見. 而江上遙山. 黛綠如鬟. 江光如鏡. 曉月如眉. 泣念墮. 獨幼時事歷歷. 又多歡樂. 歲月長. 中間常苦離患. 憂貧困. 忽忽如夢中. 爲兄弟之日. 又何甚促也.

去者丁寧留後期
猶令送者淚沾衣
扁舟從此何時返
送者徒然岸上歸

유인(孺人, 벼슬하지 못한 선비의 아내를 사후에 일컫는 존칭)의 휘는 아무개이며 반남 박씨이다. 아우인 지원 중미(仲美, 박지원의 자)가 다음과 같이 쓴다:
 

유인은 열여섯에 덕수 이씨 집안 이택모 백규(伯揆, 이택모의 자)에게 시집가 딸 하나 아들 둘을 두었으며 신묘년(1771년) 9월 초하루에 돌아갔다. 향년은 43세이다. 남편의 선산이 아곡(경기도 양평 소재)에 있었으므로, 그곳의 남서쪽을 등진 자리의 묘역에 장사지내게 되었다.
 

백규가 어진 아내를 잃고 난 뒤 가난하여 생계를 이을 수 없게 되자, 그 어린 것들과 계집종 하나와 크고 작은 솥과 상자 따위를 가지고 배편으로 협곡에 들어가기 위해 상여와 함께 출발했다. 나는 새벽에 두포(팔당댐 부근. 여기서 남한강을 거슬러 오르면 양평군을 지날 수 있다)에 정박한 배 안에서 통곡하고 돌아왔다.
아, 슬프다! 누님이 갓 시집가서 새벽에 단장하던 모습이 어제런 듯하다.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다. 까불대며 토욕하는 말처럼 뒹굴면서 신랑의 말투를 흉내 내어 더듬거리며 정중한 체했더니, 누님이 수줍어 하다가 빗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내 이마를 건드렸다. 나는 성질을 부리며 울고 먹물을 분가루에 섞는가 하면 거울에는 침을 뱉었다. 누님은 비녀와 머리장식을 꺼내어 주며 울음을 그치도록 나를 달랬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스물여덟 해가 흘렀다!
 

강가에 말을 세우니 저 멀리로 붉은 명정의 너울거림이 바라보였다. 구불대던 돛의 그림자는 강안을 돌아 나무에 가리게 되자 다시는 보이지 않는데 강가의 먼 산들은 검푸른 것이 쪽 찐 머리 같고, 강물에 감도는 빛은 거울 같고, 새벽달은 눈썹 같았다.
 

눈물을 흘리며 누님이 빗 떨어뜨렸던 일을 생각하니, 유독 어렸을 적 일이 역력히 떠오른다. 또 즐거운 일도 많았고 세월도 더디 가는 것만 같더니만 중년에 들어서는 늘 고생스럽게 지내고 가난을 걱정하다가 꿈속처럼 훌쩍 지나고 말았다. 누이와 아우로 지냈던 나날은 또 어찌 그리 촉박했는가!

떠나는 이 정녕 뒷날 다시 오마 다짐해도
보내는 이 여전히 눈물로 옷을 적실 텐데
조각배 이제 가면 언제나 돌아올까
보내는 이 하릴없이 강기슭으로 돌아간다

_연암 박지원, <맏누님 증정부인 박씨 묘지명[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伯姊贈貞夫人朴氏墓誌銘)]> 원문 및 번역문 전문



김명호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연암의 자형 이택모는 박씨가 죽고 나서, 나중에 종2품 벼슬인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이에 따라 연암의 맏누이자 이택모의 부인인 박씨도 나중에 정부인의 봉작을 받은 듯하다. 제호의 “증정부인贈貞夫人”이란 “사후에 추증되어 정부인의 봉작을 받은”이라는 뜻이다. “증정부인”은 본문의 첫 어휘 “유인孺人”과 이렇게 맞아떨어진다.
 

아무려나 남매간의 정에 견주어서는 남편의 벼슬, 사후의 봉작 따위 다 시답잖다. 갓 시집간 누님한테 응석을 부리고 신랑 흉내를 내며 장난을 거는 장면, 그예 수줍어하던 새색시가 여덟 살짜리를 울리는 장면 들은 단 몇 줄에 지나지 않지만, 그 몇 줄 사이에 연암을 여덟 살짜리가 되어 28년 전으로 돌아간다.
 

특히 어린아이의 응석을 표현한 “까불대며 토욕하는 말처럼 뒹굴면서(嬌臥馬전[馬+展])”는 표현의 압권이다.
원문 “마전(馬전[馬+展], 여기의 ‘전’은 ‘말 마’와 ‘펼 전’를 합한 글자인데 인터넷용 한자 팩에서 표현되지 않으므로 이와 같이 썼다)은 말이 진흙이나 모래에서 하는 토욕土浴을 가리킨다. 말은 진흙이나 모래에 뒹굴며 몸에 붙은 기생충, 세균 따위를 떨어낸다. 말이 토욕할 때는 마구 뒹굴게 마련인데, 여덟 살짜리 사내아이의 기운 센 까불기, 응석이 참말이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이어지는 누님의 행동까지, 다 한 가지에서 난 사이에서만 공유하고 추억할 수 있는 장면이다.

 

아내 잃은 가장과 엄마 잃은 아이들이 돌아간 아내이자 엄마의 상여와 한 배를 타고 떠나가는 장면의 배경 묘사도 연암 글쓰기의 특질을 여실히 드러낸다. “쓸쓸함” “슬픔”이라는 말 한 마디가 없지만, 상처한 사내, 엄마 잃은 아이들, 잡살뱅이 살림, 그리고 상여의 병렬이라니!

떠나간 배는 “강가의 먼 산들은 검푸른 것이 쪽 찐 머리 같고, 강물에 감도는 빛은 거울 같고, 새벽달은 눈썹 같았다”라는 영상을 남기고 영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우는 여덟 살 그때를 떠올리지만 누이는 저 배처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이제 누님은 추억할 때에만 영사되는 “풍경” “장면”일 뿐이다.
 

묘지의 명문을 대신한 칠언절구 또한 두말이 필요 없는 절창이다. 연암의 벗 이덕무는 이 시를 읽고는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고 했다. 사실 나사못회전 또한 지금 눈가가 촉촉하다. 문장으로, 어휘로, 통사로, 화용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연암의 정이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이런 것이다. 연암은 이런 글을 쓰고 있었다. [끝]


*원문의 교열 및 구두는 신호열, 김명호 두 분의 것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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