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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께서 사려 깊으시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며, 전하께서는 어리시며 그저 선왕께서 남긴 외로운 후사일 뿐입니다. 그런데 무슨 수로 온갖 자연의 재앙을 감당할 것이며, 억만 갈래 인심을 수습하시겠습니까?
(慈殿塞淵 不過深宮之一寡婦 殿下幼冲 只是先王之一孤嗣 天災之百千 人心之億萬 何以當之 何以收之耶)


위 인용문은 조식(曹植, 1501~1572)이 쓴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의 한 구절이다.

호 “남명南冥”으로도 유명한 조식은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중기 영남의 학풍을 반분한 대학자다. 대학자이되 지리산 자락에 파묻혀 오로지 자기 공부와 후학 양성에 힘쓴 학자다.
이익 <성호사설>에서 조식을 평해 “우리나라에서 기개와 절조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고 했는데, 기개와 절조 때문이었는지 조식은 결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명종에서 선조에 이르는 조정이 그를 불렀건만 조식은 요지부동이었다. 문장 또한 많이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썼다 하면 위 인용문에서 보이는 서슬 퍼런 구석이 있었다.

<을묘사직소>는 조식의 나이 55세, 문정왕후가 명종의 뒤에서 권력을 쥐고 있을 때, 단성현감을 주며 부르자 이를 사직하며 올린 글이다. 여기서 ‘자전’은 문정왕후이고, ‘전하’는 명종이다. 아무튼 당시의 최고위가 벼슬을 주겠다고 불렀는데 그에 대한 대꾸가 이런 식이었다.
조식에게 당시 조정이란, 도무지 못 믿을 자들의 도깨비굴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아주 분명하고도 신랄하게 ‘미래를 알 수 없는 일개 과부와 고립무원의 고아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선을 싹 그었다. 이 말에서 체제 자체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읽는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全身四十年前累 온몸에 사십 년이나 쌓인 때
千斛淸淵洗盡休 천 섬이나 되는 맑은 냇물로 씻어버리리
塵土倘能生五內 티끌이 혹시나 내 오장 속에 생긴다면
直今刳腹付歸流 지금 당장 배를 갈라 물에 흘려 보내리



위 시는 조식이 친구들과 감악산 아래 냇물에서 목욕하며 놀다 쓴 시, <냇가에서 목욕하며[욕천浴川]>의 전문이다.

앞서도 보았지만 서슬이 퍼렇다 못해 사람 서늘하게 하는 구석, 조식에게는 그런 구석이 있었다.
장마를 앞둔 여름날, 문득 서늘한 시 한 수를 들여다보았다.
내 배 갈라 내 배를 씻어내야 좀 시원해질까 싶은 올해 여름이다. [끝]

*사진은 친구 솔밧의 블로그 http://vertciel.blog.me/70111704714 에서 가져왔다. 다시 한 번 솔밧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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