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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정조 4), 조선 조정은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을 맞아 축하 사절단을 꾸린다. 그리고 이 사절단의 정사(正使, 사절단장)에 영조의 사위이자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의 팔촌형인 박명원을 임명된다. 연암은 이때, 일생을 걸쳐 어쩌면 딱 한 번 집안 인연을 활용했는지 모른다. 연암은 직제에도 없는 비공식 시종 병졸 자격으로 팔촌형님이 사절단장으로 있는 사절단에 껴든다. 당시 연암의 나이가 마흔넷. 생각과 글쓰기 모두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중년에, 세계 문명의 중심지이자 북학론北學論의 현장인 청제국에 육박할 기회를 맞은 것이다


연암은 18세 무렵을 지나면서는 썩은 세상에 대한 실망과 과거 급제만을 위한 글공부에 대한 회의에 빠져 있었다. 실망과 회의는 두통과 우울로 나타났고, 오로지 창작과 여행을 통해 그 두통과 우울을 잠시 달랠 뿐이었다. 다만 양반 집안 자제였던 만큼 마지못해 과거를 보기도 했다.

연암은 서른넷에 응시해 두 차례 초시(예비 시험)에서 두 차례 모두 수석을 차지하고 만다. 게다가 이를 기특하게 여긴 영조의 명으로, 국왕 영조 앞에서 시권을 낭독하는 특전까지 누린다. 그러나 연암은 마지막 관문인 회시(최종 시험)에서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았다(또는 백지 답안지를 제출한 듯). 과거가 안중에 없음, 세속적인 입신양명에 어떤 미련도 없음을 이처럼 분명히 한 예가 조선사에 다시 있을까. 청제국 여행 기회는 그러고 나서 딱 10년 뒤에 연암을 찾아왔다.

여정은 길었다. 1780624일 압록강을 건너, 81일 북경에 도착, 청 예부로부터 예정에 없던 예식 참가를 명받아 810일 열하로 이동, 820일 북경으로 되돌아와 약 한 달쯤 체류, 이윽고 917일 북경을 떠나, 1027일 서울 도착해 조정에 귀성을 신고. 그리고 그 발걸음은 <<열하일기>>라는 호한한 문서에 오롯이 집약되었다.

어렵게 얻은 기회였고 여정은 험했지만 행운도 있었다. 무엇보다 청제국 정치, 외교, 군사의 가장 치열한 현장 열하를 방문한 것이야말로 행운 가운데 행운이었다. 열하는 청 황제의 여름 피서지로 이전 조선 사신들은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다. 한데 때마침 예정에 전혀 없던 열하 일정이 느닷없이 생겼고, 덕분에 직제에도 없는 비공식 수행원 자격으로 사절단에 껴든 연암까지 얼떨결에 열하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이제 보겠지만, 청 황제의 열하 피서는 말 그대로의 피서가 아니다. 무슨 말인가? 황제의 거둥에는 엄청난 병력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그 피서지와 이동로 일대는 계엄 상황이 되게 마련이다. 당시 건륭제의 피서와 거둥이란, 실제로는 팀스피리트 연습과 다를 바 없는 군사연습이자 군사도발이자 무력시위였다. 누구를 겨냥한 것인가? 그 누구보다 청제국을 위협하고 있던 몽골과 티베트를 겨냥한 것이었다.

내가 열하에 이르러 묵묵히 살펴본 천하의 특이한 형세가 다섯 가지다.
황제는 해마다 열하에 가 머문다. 열하는 만리장성 밖의 황폐하고 외진 곳이다. 그런데 천자는 무엇 때문에 괴로움을 무릅쓰고 이 국경 밖의 황폐하고 외진 곳에 머물까? 명분은 피서다. 그러나 그 실제는 천자가 몸소 변방을 수비하는 것이다. 그러니 몽골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 만하다.
황제는 서번의 승왕(西番僧王, 여기서는 티베트의 판첸라마를 가리킴)을 맞아 스승으로 삼고, 황금 전각을 세워 거처하게 한다. 천자는 무엇 때문에 괴로움을 무릅쓰고 이처럼 상식 밖의 굴욕스럽고 낭비가 심한 예절을 차리는 것일까? 명분은 스승(판첸라마)에 대한 예우다. 그러나 실제는 판첸라마를 황금 전각에 억류해 둠으로써 청제국에 하루라도 별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 서번이 몽골보다도 훨씬 강성함을 알 만하다. 이 두 가지 때문에 황제는 진작에 마음속이 괴로운 것이다.”
_<<열하일기>>, <황교문답黃敎問答>에서


위에서 보듯 연암은 북경을 벗어나 열하에 이르는 동안 황제의 거둥이 국경의 계엄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임은 꿰뚫어보았다
아울러 몽골 48부의 추장 저마다가 황제 직속의 왕으로 임명되어 몽골이 부족 단위로 분열된 속사정, 티베트 불교의 황교파가 티베트는 물론 몽골까지 석권하자 청제국이 티베트의 판첸라마에게 황제와 대등한 예우를 베푸는 이면 들에 청제국의 노련한 이이제이以夷制夷” “이호제호以胡制胡의 정치외교가 도사리고 있음을 포착해냈다.

나아가 연암은 당시 청
-몽골-티벳 및 청제국 역내외 여러 민족의 움직임과 갈등을 생생하게 기록해 <<열하일기>>에 담았다. 특히 1780, 당시 티베트 불교의 제6대 판첸라마가 건륭제와 대등한 예우를 받으며 열하에서 회동하는 모습을 그린 대목은 중국 외교사, 중국-티베트 외교사의 역사적 순간을 포착한 진기한 사료로 오늘날에도 높은 평가받고 있다. <<열하일기>>열하에는 이처럼 단순한 지명 이상의 의의가 깃들어 있다.

황제가 탄 가마가 반선(班禪, 판첸라마) 앞에 이르니, 반선이 천천히 일어나 걸음을 옮겨 탑상(榻上, 의자) 동쪽에 서서 기쁜 듯 미소를 띤 얼굴을 짓는다. 황제는 네댓 간 떨어진 곳에서 가마를 내려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서는 두 손으로 반선의 손을 잡고 서로 끌어안고 마주 보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_<<열하일기>>, <찰십륜포札什倫布>에서


이 문단의 앞에는 청제국 고위 관리들이, 황제보다 먼저 나온 판첸라마에게 머리를 조아려 인사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어서는 위 묘사 그대로, 황제가 아이쿠, 제가 좀 늦었어요하며 판첸라마에게 종종걸음 쳐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바로 이 장면을 담은 <<열하일기>>의 한 권인 <찰십륜포>찰십륜포또한 제국으로서는 상식 밖의 굴욕스럽고 낭비가 심한 예절이되, 제국의 정치외교의 고심의 총체와 같은 건축이다.
건륭제는 연암의 사절단과 마찬가지로, 건륭제의 칠순 축하를 명분으로 열하를 방문한 당시의 판첸라마를 위해, 타시룸포(티베트 라싸에 자리한 승원)를 모방해 만든 모형 타시룸포, 찰십륜포를 열하에 세우는 적극적인 외교를 기획했던 것이다.

연암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관찰하되 그 이면까지 꿰뚫을 수 있었을까?
하나는 여행 전의 공부다. 과거만을 위한 공부를 작파하면서, 연암의 시야는 조선을 넘어 대륙으로 넓어졌다.
둘째는 그만한 시야에 공명할 수 있는 동료의 존재다. 연암보다 앞서 청제국을 여행한 홍대용, 박제가 들은 책에는 담을 수 없는 살아 있는 정보를 그에게 전했다.
 

<<
열하일기>>에서 청제국 체제의 규모가 워낙 거대함을 제시한 대규모大規模라는 표현, 그 대규모의 작동 원리가 실은 세심함에 있음을 한마디로 제시한 세심법細心法이라는 한마디는 동료 홍대용의 견해를 이어받은 것이다. 거름으로 쓰려고 쌓아둔 똥무더기, 가지런히 쌓은 벽돌, 곧게 뻗은 거리를 결코 심상히 지나치지 않은 감수성은 박제가 및 박제가의 청제국 견문록인 <<북학의北學議>>와 맥이 통한다.

연암은 썩은 세상에서의 출세를 포기한 자리에서 쌓은 공부에, 썩은 세상에서 더욱 돋보인 우뚝한 벗들과의 교감을 더해 그만한 눈, 그만한 필치를 갖출 수 있었다. 연암은 열하에서뿐만 아니라, 여정 내내 제대로 느끼고, 제대로 보고, 제대로 쓰려는 노력을 놓지 않았다. 그는 이르러 보고 겪은 모든 것-정치외교, 군사, 행정, 학술, 건축, 도로, 시장, 서민 생활, 황실 사정, 사절단 생활의 세부 등-의 안팎을 예리하게 관찰했고 꼼꼼히 기록했다. 그 모든 것이 응축된 문서가 바로 <<열하일기>>.

연암은 <<열하일기>>를 통해 여행을 연장했다. 연암은 조선에 돌아오자마자 정리 및 편집 작업에 들어가, 1783년 경 탈고한 <<열하일기>>, 보완을 거치기도 전에 필사본으로 퍼져나가며 당대 최고의 화제작이 되었다. 거침없는 묘사, <걸리버 여행기> <돈키호테>의 알레고리를 방불케 하는 독한 풍자와 해학, 여행가만이 형상화할 수 있는 이국정조 들이 그 화제의 고동이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열하일기>>는 지배계급의 눈에는 볼온하기 짝이 없는 문서였다.

1792
년 정조는 문체 타락의 원흉으로 연암을 꼭 집어 견책했고, 이에 편승한 일부 문인들이 연암과 <<열하일기>> 비난에 열을 올렸다.
세상의 화제, 국왕의 견책, 문단의 비난을 거치는 동안 연암은 끝내 자신의 손으로 확정한 교열본에 의한 <<열하일기>> 출간은 이루지 못한다. 1805(순조 5) 서울 재동 자택에서 연암이 세상을 떠나고, 그 편집 수준이 어떻든 <<열하일기>>가 처음 간행된 때는 20세기 하고도 십 년이 더 지난 1911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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