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새봄이 되면, 새봄에 활짝 핀 꽃을 보면 떠오르는 시인이 있다. 백운거사白雲居士라는 호로 유명한 이규보(李圭報, 11681241)가 바로 그 사람이다.이규보는 1168년 고려 의종 22년에 태어나, 스물두 살에 처음 사마시에 합격했고, 서른두 살 무렵 본격적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1236년 고려 고종 23년 조정에 사직을 애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237년 고려 고종 24년에야 사직할 수 있었다

 

사직이 받아들여진 당시, 이규보의 관계官階는 종2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이르렀고 관직은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에서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판예부사判禮部事” “한림원사翰林院事”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이르는 여섯 가지를 겸하고 있었다. 여섯 벼슬 모두 외교문서를 포함한 나라의 중요한 문서를 잘 다룰 능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임금과 조정의 자문 상대가 될 만큼 뛰어난 학식과 경험을 갖춘 인물이어야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이토록 화려한 이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에서 나왔다. 무단 일변도의 통치로는 나라의 체모를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달은 최씨 정권은 내정과 외교에 걸쳐 제대로 된 문서를 꾸릴 수 있는 인력이 필요했고, 글을 가지고야 나라의 체모를 제대로 세울 수 있다는 점을 아프도록 새기고 있었던 시인은 이미 가슴속에 난만爛漫한 자신의 글을 어떻게든 천하에 피워내고 싶었다.

무신시대
1170년 정중부가 주도한 무신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규보는 겨우 두 살이었다. 1170년부터 1270년까지 100년간, 고려의 정권은 무신의 손아귀에 놓인다. 100년간을 무신시대라고 하는데, 이규보는 일흔넷에 죽을 때까지 꼬박 무신시대를 살다가 간 셈이다.
무신시대는 세 단계로 나뉜다. 첫 단계 26년간은 정중부, 이의방, 경대승, 이의민 들이 차례로 권력을 잡았다. 이들은 사치 풍조에 물든 임금 및 문신의 잔치나 들놀이 따위에 호위 업무로 불려 다닐 뿐,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무신의 난은 그 불만이 쌓인 끝에 터진 정변이지만 난을 일으킨 자들에게는 나라의 병폐를 일소하려는 이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정변으로 권력을 쥔 무신 대부분은 깡패나 다름없었다. 다만 임금과 문신의 호위를 서며 익히 보고 들은 사치와 향략에는 일찌감치, 확실하게 눈을 떴다.
이들 가운데 이의민, 두경승 같은 자들은 조정의 집무실에 앉아서 누구 주먹이 더 센가를 겨루기까지 했다. 이들은 집무실 기둥을 치고 바람벽을 부수며 완력을 겨루었다. 특히 이의민 같은 자는 임금 자리에서 물러난 고려 의종의 등골뼈를 제 손으로 부러뜨린 뒤 연못에 집어던질 정도로 잔인했다.
무신시대의 두 번째 단계는 1196년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고 정권을 잡으면서 시작되었다(이때 이규보는 29). 최충헌이 일으킨 최씨 정권은 62년간 정권을 독차지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 12년간은 최씨 정권의 잔당이 버티던 기간이다.
무신시대는 그야말로 어지러운 세상, “난세亂世였다. 무식한 자들이 설치면서 나라의 행정 능력은 땅에 떨어졌다. 정권을 독차지한 세력이 탐욕을 부린 까닭에 백성과 노비와 천민은 이전보다 더한 세금과 부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 때문에 정권에 맞선 문신, 스님, 백성, 그리고 노비를 비롯한 천민이 봉기는 무신시대 100년간 전국에서 잇따랐다. 1231년에는 몽골까지 쳐들어왔다. 몽골의 침입은 1259년 고려가 항복할 때까지 여섯 차례나 이어지며 고려 인민들을 도탄에 몰아넣었다. 나라의 모든 것이 피폐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사학에서 공부하다
이규보의 아버지 이윤수는 황려현(오늘날의 여주)의 향리 세력 출신으로 추정된다. 이윤수는 낮으나마 개성에서 관직에 있었고, 고려의 과거 제도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사학私學, 곧 일종의 사립학교에서 과거를 준비하는 풍경이 낯설지 않은 세상을 살았다. 그러니 아들에게도 일찌감치 한문과 유학을 배우게 했을 것이다. 과연 이규보는 일찍부터 공부에 재주를 나타냈으니 열한 살 에는 남의 시에 즉흥시로 화답하는 재주를 보일 정도가 되었다. 열네 살에는 고려의 유명한 학자 최충(崔沖, 984~1068)이 세운 사학에 나가 공부를 하기도 했다.
최충은 학문 진흥과 사학 발전에 큰 공을 세워 해동공자로 칭송받은 고려의 학자다. 그가 세운 유명한 사학이 9재학당九齋學堂인데, 이규보는 9재학당 가운데 성명재誠明齋에서 수학했다. 그러나 과거와는 금세 인연이 닿지 않았다. 이규보는 열여섯 살 이후 세 번이나 과거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낙방하고 만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벌써 이규보는 시험공부보다는 문학의 꽃인 시에 푹 빠져 있었다. 시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술에도 빠져 있었다. 그러다 스무 살도 흘려보내고, 스물두 살 되던 해에 비로소 과거에 합격한다.


마음은 다른 곳에
과거에 합격했다지만 벼슬길이 바로 나지는 않았다. 삼십대에 제대로 관직에 나서기 전까지, 이규보는 고민이 많은 무관無冠의 젊은이요 임용 대기자일 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간 스물넷에는 개경의 천마산에 들어가 시를 쓰며, 방황하며, <장자莊子>의 세계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저 하늘의 흰 구름처럼 유유자적하길 바란 뜻이 담뿍 담긴 백운거사라는 호는 이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는 방황의 시기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사상을 탐색하고 겨레의 역사에 빠져든 시기이기도 하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에 쓴 고구려 건국 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가 그 증거다.
동명왕이란 고구려를 연 주몽이다. 이규보는 그때의 고려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던 신비롭고 기이한 일과, <구삼국사舊三國史> 등 지금은 전해오지 않는 역사책까지 두루 참고해 신화, 전설, 민담, 역사를 아우르는 한 편의 웅장한 서사시를 이룬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중국 역사에도, 무엇보다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 같은 자료에도 주몽의 이야기는 나온다. 하지만 <동명왕편>만큼 내용과 세부가 풍부하고 짜임새 있는 주몽 이야기는 없다.

그 비문에 나오는 이야기
<광개토왕릉비문>은 좋은 비교지가 될 것이다. 서기 414년 고구려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왕의 묘역과 수묘인을 확실히 하기 위해 세운 광개토왕릉비의 비문에는 고구려의 기원과 주몽(비문에서는 추모왕鄒牟王”)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건국의 위대함에 광개토왕의 위대함을 잇댄 <광개토왕릉비문>의 주몽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그리고 다음이 전부다.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옛적 시조이신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出自北夫餘
북부여에서 나왔으며

天帝之子
, 母河伯女郎
천제의 아들이었고, 그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剖卵降世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生而有聖
□□□□□□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이 있었다(5자 인멸. 판독 불가)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거둥을 준비해 남쪽으로 가다가 길이 부여 땅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었다.

王臨津言曰
,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鄒牟王, 爲我連葭浮龜
왕이 나루에서 말했다.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늘 위해 갈대를 잇고 거북을 띄우라!”

應聲卽爲連葭浮龜
말을 마치자마자 곧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떼가 떠올랐다.

然後造渡
,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 而建都焉
그런 다음 물을 건너 비류곡 홀본 서쪽에 자리한 산에 성을 쌓고 거기에 도읍을 세웠다.

不樂世位
, 因遣黃龍來下迎王
왕위에 싫증을 내자, 황룡이 내려와 왕을 맞이하였다.

王於忽本東岡
, 履龍頁昇天
왕은 홀본의 동쪽 언덕에서 황룡의 목덜미를 밟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계속]


*사진 출처
http://vertciel.blog.me/70105429875

친구 솔밧이 자신이 촬영한 꽃 영상을 빌려주었다. <새봄에 생각나는 시인 이규보>에 딸린 글에 오르는 꽃 그림은 모두 솔밧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솔밧께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한다. "고마워!"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