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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조선의 남아여!
백림마라톤에 우승한 손, 남 양군兩君에게

그대들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이천삼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소리에 터질듯 찢어질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炬火를 켜든 것처럼 화닥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 속에서 조국의 전승戰勝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勇士 서로 껴안고 느껴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터이냐!”

지난 글에서 심훈의 <박군의 얼굴> <야구> 2편의 시를 소개했습니다. 거기서 여운형은 1936년 심훈의 장례식에서 심훈 최후의 시 <오오, 조선의 남아여!>를 울면서 낭송하며 심훈을 보낼 정도로 심훈과 절친했다고 말씀드렸죠. <오오, 조선의 남아여!>의 전문이 위와 같습니다.

193689, 독일에서 열린 베를린올림픽의 마라톤 경주에서 조선인 손기정과 남승룡은 각각 제1위와 제3위 테이프를 끊으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죠.

야박하게 말해
, 그때 조선은 일본제국의 일부였습니다. 손기정과 남승룡 두 사람은 일본제국의 신민이었습니다. 이들은 국제대회인 올림픽에 일본선수단의 일원, 재패니스 손 기테이난 쇼류로 출전해야 했죠.

이들의 우승은 일본제국은 영광이기도 했고 조선의 긍지이기도 했습니다. 야박하게 말해, 조선만이 그 영광 그 긍지를 누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들의 소식이 조선인에게 전해진 시점은
1936810일 새벽입니다. 소식을 접한 신문사들은 호외를 발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심훈 또한 호외를 통해 이 소식을 듣고는 감격에 겨워 호외 뒷면에 <오오, 조선의 남아여!>를 일필휘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는 심훈의 최후의 작품이 되었고, 심훈의 장례식장에서는 여운형의 낭송을 통해 자신이 쓴 자신의 만가가 되었습니다.


원문의 한자어는 거의 다 한자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 , 남 두 사람은 전승용사로 불립니다. 스포츠가 전투가 됐네요.

이어 다시 한 번 야박하게 말해, “규칙이 엄격한 긴 거리 달리기에서 조선 사람 둘이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함께 달린 끝에 제1위와 제3위를 차지했을 뿐인데, 심훈은 인류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싶답니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깊은 밤 전승의 방울소리에 터질듯 찢어질듯.”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약한 족속이라고 부를터이냐
!”


앞서의 <야구>도 그렇고 예서도 그렇고, 어찌 보면 조금은 촌스러워 보이는, 우울과 울결도 새 나오는 듯한, 열등감의 거울상이 잡힐 것만 같은, 그때 그 시 그 감탄문 앞에서 저는 오히려 야박할 수만은 없네요.

이렇게 읽고 있는 동안은, 읽기 전에 튀어나오는 "공격성" "남근숭배" "지나쳐서 결국 싱거운 말맛" "기어코 무너진 시적 구조" 들에 대해서는 따로이 군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누가 지적하지 않아도 그쯤은 저도 읽습니다. 그런데 당장은 이런 생각이 오락가락할 뿐입니다.

-새로운 정신뿐 아니라 새로운 몸에 눈뜬 선각자들에게 스포츠는 또 하나의 반제국주의투쟁의 전선이자 반봉건주의투쟁의 전선이었지...
-이 시기 조선 스포츠계의 전국구 지도자는 단연 여운형이었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손기정을 비롯해 이상백 들이 속해 있었음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구나... 아니 당연하지...
-여운형은 심훈의 장례식을 지켰지... 손기정은 여운형의 영결식에서 제 어깨로 여운형의 관을 운구했지...

공연히 쓸쓸해진 채로, 머리 속이 이렇습니다. 총총.



---덧붙임---
1)손기정 선수가 제1위로 테이프를 끊는 장면은 위키백과에서 퍼왔습니다.
2)이상백(1904~1966). 서울대 교수를 지낸, 사회학자, 그 이상백입니다. 이상백은 와세다대학 농구 선수로 뛰었고, 미국에도 친선 경기를 다닐 정도로 농구광이었습니다. 1930년 일본 농구협회를 창설해 상무이사를 맡았고, 1931년에는 일본체육회 상무이사로 선임되었습니다. 1936년에는 일본체육회 전무이사 겸 일본대표단 총무로 베를린올림픽에 나갔습니다. 여운형 사거 뒤에는 정치와는 일절 연을 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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