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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의 17세손

하늘나라[天帝]와 물나라[河伯]를 아우른 혈통으로, 알에서 이 세상에 나와[剖卵降世], 나라를 세우고, 황룡의 목덜미를 밟고 승천한 고구려 시조 추모왕, 곧 동명왕. <광개토왕릉비문>은 소략한 기록일망정 동명왕과 광개토왕을 이렇게 연결하고 있다.

 


유명을 이어받은 태자 유류왕은 도로써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은 정권을 이어나갔다. [추모왕]17세손에 이르러, [17세손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이라고 하였다. 그 은택은 하늘에 미치고 군사적 위력은 사해에 떨쳤으며 □□을 제거하니(2자 인멸. 판독 불가) 사람들은 저마다 생업에서 편안했으며 나라와 인민은 넉넉했고 오곡은 풍성했다. 하늘이 [우리 인민을] 불쌍히 여기지 않아 39세에 돌아가시니 갑인년 929일 을유일에 산릉으로 운구했다. 이에 비를 세우고 공적을 기록해 후세에 보이고자 한다(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儒留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掃除□□(2자 인멸. 판독 불가),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皇天不弔, 卅有九, 晏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銘記勳績, 以是後世焉).”

이렇듯 능비문은 광개토왕의 위업을, 저 멀리 16대 위 시조인 동명왕의 위대한 탄강 및 눈부신 창업과 연결한다. 나아가 제2대 유류왕[유리명왕]과 제3대 대주류왕[대무신왕, 또는 대해주류왕]의 정권 계승과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
이왕 말이 나왔으니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란 왕호를 지나칠 수가 없다. 한번 들여다보자.

1)국강상國岡上_능묘가 위치한 곳의 당시 지명일 것이다.
광개토왕 이전에 이미 능의 소재지로 왕호를 표시한 예가 있었다. 고구려 제16대왕인 고국원왕故國原王고국지원故國之原에 묻혔다.
2)광개토경廣開土境_“국토의 영역을 크게 개척하시다라는 말이다.
이는 재위중의 대표적인 업적을 표시한 것이다.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생전에 64, 1,400을 정복했다고 한다.
3)평안호태平安好太_이는 앞 구에 이어 후세의 평가를 깃들인 휘호徽號로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서 평안은 내치가 훌륭했음을 드러내며 이미 나온 이도흥치以道興治란 표현을 떠오르게 하는 수사이기도 하다. “호태는 미칭 또는 존칭으로 보면 될 것이다.

한편 경주에서 출토되었으며 장수왕 3년쯤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호에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이라는 이칭이 보이고, 5세기 고구려 귀족의 무덤에서 나온 <모두루묘지牟豆婁墓誌>에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聖王이라는 이칭이 보인다. 능비문에 보이는 왕호나 두 유물에 보이는 이칭 모두 국강상에 잠든, 나라의 영역을 크게 개척한, 평안한 치세를 이룬, 대단한 군주라는 표현과 뜻을 담고 있음은 마찬가지다.



<
삼국사기><삼국유사> 속 주몽-동명왕
지금까지 <광개토왕릉비문>에 실린 동명왕 기록에 대해 장황할 정도로 살펴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동명왕편>12세기까지 고려 사람들에게 전해진, 고구려 사람들이 남긴 고구려 건국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동명왕편>이 탈고되기 이전에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동명왕편> 탈고된 뒤에 완성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주몽-동명왕 이야기는 실려 있다. 그리고 두 책 다 <광개토왕릉비문>에 실려 있는 주몽-동명왕 내력의 줄거리만큼은 공유한다. 하나 정사正史 체제의 본기와 연표에 자리한 <삼국사기> 속 주몽-동명왕 이야기는, 이규보가 보기에는 생략된 부분이 많았다. 한편 <삼국유사>왕력편王曆篇에서 별다른 설명 없이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했으며, 그때까지 전해지던 여러 부족국가 기록까지 망라한 기이편紀異篇에다 <삼국사기>의 그것보다 축약된 주몽-동명왕 기록을 싣고 있다. 물론 두 책 다 <광개토왕릉비문>의 주몽-동명왕의 이야기의 줄거리를 공유하는 만큼, 딱 그만큼 범위에서, 세부가 부족한 이야기소를 공유한다. 예컨대

1)이야기 시작의 무대는 부여.
2)하백의 딸 유화가 천제의 아들을 자처한 해모수와 정을 통해 주몽을 임신.
3)딸의 야합에 화가 난 부모가 유화를 버림.
4)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유화를 부여의 왕 금와가 보호.
5)유화가 알을 낳자 개, 돼지에게 버렸으나 뭇 짐승들이 오히려 알을 보호.
6)알에서 주몽 탄생. 나면서부터 활쏘기에 빼어남.
7)금와가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자 나쁜 말은 잘 먹여 살지게 해 금와에게 제공하고, 좋은 말은 덜 먹여 마르게 한 뒤 주몽이 가짐.
8)금와의 일곱 아들이 주몽을 시기하자 유화의 권유로 오이 등 일행과 함께 부여 탈출.
9)기병대에 쫓기는 판에 강물에 가로막히자 자신을 천제의 아들, 하백의 손자라 하면 강물에 호소,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어 도강.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만든 다리는 곧 사라져 기병대는 도강할 수 없었음.
10)도강 뒤 졸본에 도읍하고 건국.

여기까지가 <삼국사기><삼국유사>가 공유하는 이야기소다. 그러나

1)주몽이 도강한 뒤 세 사람의 동지를 더 얻음.
2)불류국왕 송양과 졸본을 놓고 입씨름과 활재주로 다툰 끝에 주몽이 송양의 항복을 받음.

등의 이야기소는 <삼국유사>에는 없다. <삼국사기>는 이 뒤에도,

1)동왕명 2년 이후 점차 고구려가 나라의 체모를 갖춰 가는 과정,
2)주변 정복 전쟁, 금와가 유화를 태후의 예로 장사지낸 사실,
3) 동명왕의 처와 아들(나중에 제2대 유리왕에 오른)이 고구려로 도망해온 사실,
4)끝으로 동명왕 19년 가을 9월에 동명왕이 세상을 떠난 데까지,

를 간략하나마 정사답게 기록했다.
[계속]



*사진 출처
http://vertciel.blog.me/70105429875
<새봄에 생각나는 시인 이규보> 속 꽃 그림은 모두 솔밧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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