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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이십대를 난필과 난독과 침잠으로 가로지르며, 이규보는 제대로 된 벼슬에 더욱 욕심을 내게 된 듯하다. <동명왕편>에서 보인 것 같은 빛나는 재주가 있다고 한들, 다만 임용 대기자의 재주라면 과연 그 재주가 꽃필 수 있겠는가.

이규보는 22세에 과거에 합격한 뒤, 25세에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자전自傳을 썼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연보는 이 글쓰기를 일러 “스스로 자신의 행동거지를 서술했다(自敍己之行止)”고 했다. 여기서 행동거지란 “일상과 삶 속 자신의 몸가짐 전체”로 새기면 되겠다. 

이규보는 24세에 아버지 상을 당한 뒤 천마산에 우거하며 난독과 난필의 세월을 보내다 드디어 지나온 자신의 생을 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앞날의 생 또한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이윽고 26세에는 <동명왕편>을 완성해 나라와 시대를 향한 포부를 웅대하고 화려한 서사시로 제시했다. 그 뒤 이규보는 명망가들의 사교 모임에 껴들어 자신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1196년 그의 나이 29세에 최충헌이 정권을 잡자 더욱 적극적으로 세상에 나가려 한다. 그러나 삼십대에도, 이름은 최충헌 주변에 알렸을망정 자신의 뜻을 펼 자리를 잡지는 못했다.

기회는 1207년 그의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에야 찾아왔다. 이규보의 재주와 명망을 인정한 최충헌이 한림원翰林院의 임시 보직에 이규보를 배치한 것이다.

한림원은 왕명에 의한 문서 및 외교문서를 다루는 곳이다. 무신 정권의 무단 정치는 문신관료-학자관료의 씨를 말렸고 그 때문에 무신들이 정권을 잡은 뒤, 나라의 문서며 외교문서를 맡을 만한 사람이 늘 부족했다. 그러므로 이규보의 글재주는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40세에 한번 권력자들에게 알려지자 이규보의 벼슬길은 제대로 열렸다. 사직할 당시 그의 자리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1237년 고려 고종 24년, 이규보가 정식으로 사직할 때 그의 관계官階는 종2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이르렀고 관직은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에서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판예부사判禮部事” “한림원사翰林院事”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이르는 여섯 가지를 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규보는 시인의 자존심을 버리고 무신 정권에 빌붙은 것일까?


시인의 출세

“벼슬, 벼슬이 없소/여기저기다 빌어 입에 풀칠하기는 내 뜻이 아니오(常無官常無官, 四方糊口非所欲)”

위 인용문은 이규보가 본격적인 벼슬길에 오르기 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벼슬 없음을 한탄하며[無官嘆]>의 한 구절이다.

이규보는 관직 생활 내내 문신관료-학자관료 일에만 매달렸다. 그가 행정 문서를 정리하고, 중국․몽골 들과 외교문서를 주고받는 동안 고려의 국가로서의 체모는 상당한 격을 갖출 수 있었다. 그의 연대기는, 그의 벼슬살이가 “입에 풀칠하기” 너머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규보는 그의 시에 농민과 농민의 생산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농민이 어떻게 수탈당하는지도 그대로 썼다. 관료로서 민중봉기 토벌군에 종군해야 할 때도 민중에 대한 동정심을 잃지 않았다. 그는 현실 저 너머의 몽롱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가 보고 겪고 느낀 데서 나온 실감을 시에 담았다. 그저 권력에 빌붙은 사람에게서 이런 시가 나올 수 있었을까.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평가가 참고가 될 듯하다.

“그는 현실정치 또는 관계에 뛰어들었으나 권력을 휘두르거나 빌붙으려는 뜻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왕성한 참여의식의 발로였다. 뒷날 그는 최씨의 대몽항쟁을 찬양하였으나 최씨들의 횡포를 감싸지는 않았다.”

“이규보는 최씨정권에 아첨하여 벼슬살이를 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부에 들지도 않았으며 축재를 하는 일 없이 평생을 군색하게 지냈다.”

_이이화, <이야기 한국사6: 무신의 칼 청자의 예술혼>에서

역사학자의 평가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는 어떤가.


비 맞으며 이랑에 엎드려 김을 매니 
시커멓고 추한 것이 사람 꼴이 아니네
높은 사람들아, 나를 업신여기지 마라
부귀호사가 나한테서 나오니까
帶雨鋤禾伏畝中
形容醜黑豈人容
王孫公子休輕侮
富貴豪奢出自儂

새 곡식은 푸르디푸른 채 아직 밭에 있는데

관리와 아전은 벌써 세금을 달라니

힘찬 밭갈이로 이루는 부국이 우리에게 달렸는데

왜 우리 살갗을 벗겨내나

新穀靑靑猶在畝

縣胥官吏已徵租 

力耕富國關吾輩

何苦相侵剝及膚

_<농부를 대신해서 읊다[代農夫吟] 2수>


마치며
나라에 정치외교 업무를 맡을 문신이 없는 때, 이규보의 글재주는 더욱 요긴하게 쓰였다. 이규보는 빼어난 시인으로 살았을 뿐 아니라, 안으로는 행정의 수준을 높이고 밖으로는 나라의 체면을 지키는 데 꼭 필요한 인물로 살았다.
그의 글은 문집 <동국이상국집>에 갈무리되었는데, 13세기에 이규보보다 많은 글을 남긴 고려 사람은 없다. 그가 남긴 많은 글은 아름다운 문학 작품을 넘어 한 시대의 생활과 역사를 보여준다. 거기에는 13세기 고려의 인물, 풍속, 술, 차, 김치, 가축, 채소, 과일 이야기가 남아 있는가 하면, 주몽이 나라를 세운 이야기가 있다. 농민의 아픔이 있는가 하면, 고려대장경과 금속활자에 대한 소중한 기록이 남아 있다.
젊은 날에 문학에 눈을 떠, 한 시대를 문학과 함께 하고, 거기 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담았던 시인. 이규보는 그런 시인이었다. 아울러 문장과 공부가 경세제민에 실제로 소용됨을 보여준 한국 역사상 거의 첫 문인관료였다. [연재 끝]



*사진 출처 http://vertciel.blog.me/
<새봄에 생각나는 시인 이규보> 속 꽃 그림은 모두 솔밧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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