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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洪命憙, 1888~1968), <임꺽정>의 저자로 유명한 벽초碧初 홍명희의 얼굴이다. 1930년대에 의자에 앉아 찍은 사진에서, 얼굴에 초점을 두고 따냈다.
홍명희는 10대를 지나서는 완전히 대머리가 된 듯하다. 그의 번대머리는 지인과 대중 사이에서 일종의 아이콘, 트레이드마크 노릇을 했다.


명문 풍산 홍씨의 후예인 홍명희는 188873일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집안에서 전통적-정통적 한문-유학 교양을 익히며 자랐다. 더욱이 홍명희의 할아버지 홍승목, 아버지 홍범식 모두 정식으로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인물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과거 시험과 조정 출입과 중세 행정을 경험했으니 이름뿐만이 아닌 진짜배기 양반 출신인 셈이다.

홍명희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다섯 살 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해 여덟 살에 <소학>을 잡았다고 한다. 이후 열다섯 살에 서울 중교의숙中橋義塾 입학해 신학문을 시작하기까지 상당한 수준의 한문-유학 교양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문을 어느 정도 깨친 뒤의 독서 목록에는 <삼국지> <동주열국지> <서한연의>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가 껴 있다. 이 목록은 전통적인 교양인인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부도덕한 독서의 목록이지만 홍명희는 <삼국지>를 본 뒤 길래 소설 보기에 반하여” “어른 몰래”(<자서전>의 표현) 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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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에서, 일곱 등장인물이 저마다의 곡절과 사연을 지나 근거지로 모이는 줄거리를 떠올려 보라. 여기에 중앙정치의 타락에 따른 나라 전체의 혼란, 관권에 의한 피해대중 발생, 토호의 횡포, 무용 대결, 힘 대결, 배짱 대결, 머리싸움, 이중 첩자 들이 나오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어른들이 금한 독서가 나중 창작의 든든한 한 밑천이 아니었다고 하지 못하리라.

1905년 중교의숙을 졸업하고 잠깐 고향에 있던 홍명희는 1906년 열아홉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문일평, 이광수, 최남선 들과 교우하며 공부한다. 이 시기 홍명희는 우등생으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러시아 문학과 영국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에 푹 빠져 있었다. 러시아 문학이 얼마나 좋았는지 한때 문학 수업을 위한 러시아 유학을 목표로 러시아어 공부에 몰두하기도 한다. 무정부주의자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또한 이 시기의 목록에 껴 있다. 일본 문학, 예컨대 나쓰메 소세키, 시마자키 도오손 들의 작품도 탐독 대상이었다.

그러나 늦깎이 유학 생활은 스물셋에 끝난다. 1910년 경술년 829, 경술국치일 당일, 그의 아버지 금산군수 홍범식이 국치의 치욕을 참지 못하고 금산 객사 뒤뜰 소나무에 목을 매 자결하자 큰 충격을 받은 홍명희는 바로 조선으로 돌아온다. 당시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약한 마음을 자애로 어루만져주고 약한 몸을 자애로 휩싸주던 우리 아버지가 합방 통에 돌아가셨다. 나는 온 세상이 별안간 칠통 속으로 들어간 듯 눈앞이 캄캄하였다. ... 나라가 망하고 집이 망하고 또 내 자신이 망하였으니 아버지의 뒤를 따라서 죽는 것이 가장 상책일 줄 믿으면서도 생목숨을 끊을 용기가 없었다. 죽지 못하여 살려고 하니 고향이 싫고 고국이 싫었다. 멀리멀리 하늘 끝까지 방랑하다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아무도 모르게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 삼년상을 치러야 한다고 삼년을 지내는 동안에 겉으로 생활은 전과 같이 먹을 때 먹고 잘 때 자지만 속으로 감정은 전과 딴판 달라져서 모든 물건이 하치 않고 모든 사람이 밉살스럽고 모든 예법이 가소로웠다...”
 
_홍명희, <내가 겪은 합방 당시>, 서울신문, 1946827일치에서.

이 회상대로, 낙심할 대로 낙심해 있던 홍명희는 1912, 탈탈 털고 일어나 중국으로 떠난다. 중국에서는 박은식, 신규식, 정인보, 조소앙 들과 교류를 나누었으며 문일평, 이광수와 재회한다. 함께한 이들이 모두 저널리즘 또는 조직활동 어느 한 쪽에서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눈에 띤다.

19153월부터는 싱가포르로 가 191712월까지 싱가포르에서 지낸다. 싱가포르 체류는 화교 자본 및 중국 혁명파의 지원을 염두에 두고, 독립운동의 재정 건설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모색의 일환으로 추정된다. 그가 싱가포르를 넘어 인도까지 방랑했다는 지인의 회고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1918년 홍명희는 잠깐의 상해와 북경 생활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온다. 이듬해 1919년 기미년의 만세가 터지자 고향 괴산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가 체포되어 19204월까지 복역한다. 이후의 삶은, 해방 전까지는 반제국주의투쟁민족단일전선건설조선 문화 연구<임꺽정> 집필 들로 요약 될 것이요, 해방 이후는 단독정부수립반대운동남북통일운동 들로 요약될 것이다.

해방 전, 1920년대에 홍명희는 신사상연구회와 신사상연구회의 뒤를 이은 화요회(이상 사회주의 단체)의 주요 회원이었고, 조선에스페란토협회 회원이었고, 좌우가 함께한 민족전선인 신간회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또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학술단체인 조선사정조사연구회의 결성에 참여하는가 하면 정몽주에 대한 논문을 쓰고, 김정희며 홍대용 저작의 교열을 맡기도 했다.

행방 후, 홍명희는 1948312일 김구, 김규식,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김창숙 들과 함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를 천명한 이른바 <7거두巨頭 성명>을 발표했고, 같은 해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에 참가했다가 그대로 북에 남는다. 서울에 있던 가족들은 8월에 삼팔선을 넘어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 뒤 1948815일 대한민국 수립에 이어, 9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는 제1차 내각에서 박헌영, 김책과 함께 3인의 부수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내각 수상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김일성이다.

인민공화국에서의 이력은 1968년 돌아가 평양 교외의 애국열사릉에 묻힐 때까지 화려하게 이어졌다. 1952년에는 과학원 초대 원장에 임명되었고, 1954~1955년 사이에는 <림꺽정>(북에서는 림꺽정이다)이 간행되었다. 1957년 제2차 내각에서는 6인의 부수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고, 1961년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초대 위원장에 올랐다. 보통 조평통으로 줄여 부르며 남한에서 사갈시하는 그 위원회 말이다. 돌아가기 한 해 전인 1967년 여든 나이로 제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한때 남에서는 고유명사 홍명희를 복자覆字하고 <임꺽정>을 금서로 했다. 남한 정부로서는 해방 후 행적을 용납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해방 후 중도파 여운형뿐 아니라 우파의 거두 김구가 남에서 생명을 잇지 못한 사정, 무장투쟁의 맹장 김원봉이 일제 악질 경찰 출신인 남의 경찰에게 체포고문당한 끝에 결국 북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사정, 중도합리주의 노선을 추구하던 허헌이 1948년 평양으로 갔다가 결국 남으로 넘어오지 않은 사정 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해방 후 홍명희의 행적은 이들의 연대기와 잇대 따져 보지 않을 수 없다.

홍명희는 아들 홍기문과 맞담배질을 할 정도로 사람을 편히 대한 인물이었다. 그의 해학과 재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증언이 남아 있다.
홍명희는 190013세에 3년 연상인 여흥 민씨와 조혼해 16세에 장남 홍기문을, 23세에 차남 홍기무를 보았다. 홍명희와 여흥 민씨 사이에서는 김동리 <김연실전>의 블랙코메디가 여실히 증언한 바, “남성 유학생의 조혼 아내 버리고 신여성과 결혼하기따위는 없었다. 홍명희는 부인과 평생 금실이 좋았고 자제들 앞에서도 부인을 아끼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숙명여대 국문과 강영주 교수의 유족 면담에 따르면 차남 홍기무는 세상에 우리 어머니처럼 행복한 여자는 없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홍명희는 사회주의와 함께 국학을 연구한 인물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한문과 한국어와 일본어와 러시아어와 에스페란토는 모순이나 길항을 이룰 일이 없었다. 앞서 본 연대기가 자연스레 드러내는 바지만, 신간회 조직과 지도에서 홍명희만한 적임자도 없었다. 그러나 해방 후 좌우대립과 민족분단과 전쟁 앞에서 홍명희는 남으로부터 버림받을 선택을 하고 말았다.

연대기는 연대기다. 이력서는 이력서다. 내게는 다만 아들과 맞담배질을 할 수 있는 인물, 조혼한 아내를 행복한 여자로 살게 한 인물, 해학과 재치로 기억된 인물의 저 깊은 눈과 앙다문 입이 새삼스럽다.

해방절을 품은 8월이 막 이우는 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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