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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李光洙, 1892~미상), 한국 문학사에서 근대적 장편소설의 효시로 평가되는<무정無情>의 저자 춘원春園  이광수의 얼굴이다. 1932년 그의 나이 마흔하나에 찍은 사진에서, 얼굴에 초점을 두고 따냈다.
 


연구자 김윤식 교수는 <이광수와 그의 시대>(초판 전3권, 한길사, 1986/개정증보판 전2권, 솔, 1999)에서 <무정>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무정>은 우리 근대소설의 문을 연 작품이기에 문학사적인 의미에서 기념비적이며 작가 춘원의 전생애의 투영이기에 춘원의 모든 '문자행위' 중에서도 기념비적이 아닐 수 없다. <무정>은 시대를 그린 허구적 소설이지만 동시에 빈틈없고 정직한, 고아로 자라 교사에까지 이른 춘원의 '자서전'이다. 그 자서전은 그대로 당시 지식청년들의 자서전으로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_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2에서(한길사판)


<무정>은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총 126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연재 당시 이광수는 와세다대 재학생 신분이었다. 이광수는 <무정>을 연재하기 전인 1916년 이미 <매일신보>에 <대구에서> <동경잡신> 들을 기고한 바 있다.
이광수는 일찍이 진짜 힘있는 사람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1916년에는 매일신보 사장 아베 미쓰이를 만났으며, 1915년 제1차세계대전 탓에 중단했던 와세다대 수업을 잇게 된 것도 김성수의 후원 덕분이었다. 중학 과정을 위한 첫 일본 유학 또한 일진회 장학생으로 선발된 덕분에 가능했다. 

이광수가 대단한 집안 출신은 결코 아니다. 평안도 정주 산골짜기의, 완전히 몰락해 구차하기 그지없는 가정에서 자랐다. 이 보잘것없는 가정마저 1902년 그의 나이 열한 살에 어머니, 아버지가 콜레라로 목숨을 잃으면서 완전히 망하고 만다. 김윤식 말한 "고아"는 이 연대기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광수는 부모를 잃은 뒤 더 말을 보탤 것 없는 벌거벗은 빈곤과 외로움과 공포를 맛본 것이다.
이후 이광수는 오로지 비상한 머리 하나로 일진회 유학생과 오산학교 교사와 와세다대의 특대생을 거쳐 조선 청년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소설 <무정>의 저자에 이른다. 이미 십대에, 낮은 수준에서나마 저널리즘, 교육, 집필을 경험한 데서 출발해 일생에 이르도록 8만 매가 넘는 원고를 쓰며 시인, 소설가, 기자, 잡지편집자, 교사, 언론경영인, 조직활동가 등으로 살다간 이광수. 
하지만 그의 연대기는 "왕성한 활동"보다는 "좌충우돌"을 떠오르게 한다. 이 좌충우돌 아래에는 부성 및 모성 부재가 낳은 심리적 진공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면 너무 야박한 해석일까. 이 진공이 이광수로 하여금 못난 생부모 조선을 그리 쉽게 버리게 만들었다면 지나치게 야비한 소리일까. 나아가 못난 부모 버린 자리에 번듯한 일본제국을 너무 쉬이 가져다 자리하게 했다면 또한 지나치게 야비한 해석일까.

이십대 초반부터, 이광수는 이미 식민지 조선을 낮출 대로 낮추고, 종주국 일본을 높일 대로 높이는 시각을 굳히고 있었다. 8만 매가 넘는 원고 쓰기는, 말하자면 실제로는 별로 하는 일이 공상을 거닐었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는 필요할 때 언제나, 교사 및 저널리스트 훈련과 경험을 최대한 펼쳐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허하였다. 이에 내선일체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 없이 될 것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의 제거를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 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러한 신념으로 향산(香山, 가미야)이라는 씨를 창설하였다...

...이제 우리는 일본제국의 신민이다. 지나인(중국인)과 혼동되는 성명을 가짐보다도 일본인과 혼동되는 씨명을 가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일본인이 되는 결심으로 씨를 향산(香山, 가미야)이라고 하고 명을 광랑(光郞, 미쓰로)이라고 하였다. 내 처자도 모조리 일본식 명으로 고쳤다. 이것은 충성의 일단으로 자신하는 까닭이다... 
_이광수, <창씨와 나>, 매일신보, 1940년 2월 20일에서(위 김윤식 저서에서 재인용)


창씨개명에 관한 일종의 해명인 이 기고문은, 참말이지 명확하게 창씨개명의 의의를 제시하고 있다. 그가 일생을 걸쳐 훈련한 학습지도의 깔끔함과 저널리즘 아티클의 명쾌함이 이렇게 살아 있다.

그의 아내 허영숙도 못잖았다. 이광수 일가의 창씨개명을 비난하는 투서가 집에 배달되자, 허영숙은 굳이 범인을 잡아달라는 고발을 경찰 당국에 넣었다. 이 사건으로 정지용, 최영수, 계용묵, 정비석 들이 체포되어 취조를 당하고, 또 구류를 살아야 했다.

제 머리, 제 재주로 벌거벗은 빈곤과 외로움과 공포를 뚫고 선생님 겸 지도자 겸 당대의 명사가 된 한 인물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야박한 소리를 이미 늘어놓았으나 속이 아리다. <무정>이 한국 어학과 문학에 끼친 영향을 모른 체하는 쪽도 아니다. 말하자면 그래서 더 아리다는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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