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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에 공포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9개조는 조선이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개칭하고 국가형태로서 군주국을 천명한 흠정헌법적 성격을 가진 성문헌법”이다.
(http://www.ccourt.go.kr/ 헌법재판소 홈페이지 데이터베이스 가운데, <헌법재판소 20년사>에서)
이 9개조를 제정반포하기까지 역사의 흐름은 숨이 가쁘게 흘러 지나갔다.

1895년 을미년, 일본 깡패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민비를 살해했다. 얄궂게도 이 해 4월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자가 처형되었고, 11월 민비가 살해당했으며, 12월 30일 단발령이 내려져 온 조선이 들끓었다.
1896년 2월 11일에는 겁먹은 고종과 왕자들은 친러파 대신의 기획에 따라 정동 러시아공사관으로 달아나 숨는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고종과 왕자들은 1년 남짓 러시아공사관에 숨어 지냈다.
1897년 2월 20일 외국 공사관에 숨어 살던 고종과 왕자들이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온다. 그 뒤 조야의 이런저런 의논이 있더니 10월 12일 고종이 원구단에서 황제에 즉위한다. 이로써 대한제국 시대가 열린 것이다. <대한국국제>는 바로 이런 흐름 안에서 태어난 헌법(또는 헌법 성격의 포고)이다. 그 조문이 다음과 같다.





제1조 대한국은 세계만국에 공인公認되온 바 자주 독립하온 제국이니라.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유전즉오백년전래由前則五百年傳來하시고 유후항만세불변由後恒萬歲不變하오실 전제정치專制政治이니라.

제3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무한하온 군권君權을 향유하옵시나니 공법公法에 위謂한 바 자립정체自立政體이니라.

제4조 대한국 신민臣民이 대황제의 향유하옵시는 군권을 침손侵損할 행위가 유有하면 기이행미행其已行未行을 물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실失한 자로 인認할지니라.

제5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국내 육해군을 통솔하옵시어 편제編制를 정하옵시고 계엄戒嚴·해엄解嚴을 명命하옵시니라.

제6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법률을 제정하옵시어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옵시고 만국의 공공公共한 법률을 효방效倣하사 국내법률도 개정하옵시고 대사·특사·감형·복권을 명하옵시나니 공법에 위謂한 바 자정율례自定律例이니라.

제7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행정 각부부各府部의 관제와 문무관의 봉급을 제정 혹 개정하옵시고 행정상 필요한 칙령을 발發하옵시나니 공법에 위謂한 바 자행치리自行治理이니라.

제8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문무관의 출척黜陟·임면任免을 행하옵시고 작위 ·훈장 급及기타영전榮典을 수여 혹 체탈遞奪하옵시나니 공법에 위謂한 바 자선신공自選臣工이니라.

제9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각유약국各有約國에 사신을 파송주찰派送駐紮케 하옵시고 선전宣戰·강화講和 급及제반약조諸般約條를 체결하옵시나니 공법에 위謂한 바 자견사신自遣使臣이니라.



문장은 난삽하다. 지존무상의 존재인 대한국 황제 폐하에 대한 존대를 표시하는 조사며 선어말어미(“-온-” “-옵-” 등)가 조문 읽기조차 방해하고 있다. 이 난삽한 문장이 확인선언하고 있는 것은 황제에게 모든 권력이 돌아간 전제정이다.

제2조에 따르면 대한제국의 정치는 “유전즉오백년전래由前則五百年傳” 곧 이전 조선 왕조 500년간 전해졌으며, “유후항만세불변由後恒萬歲不變” 곧 이 뒤로 영원토록 변치 않을 전제정이다. 이 전제정의 모든 권력은 황제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제3조에 따르면 대한제국 황제의 군권은 무한하다. 제국의 신민이 이를 침해한다면? 제4조가 다음과 같이 확인한다.

“제4조 대한국 신민臣民이 대황제의 향유하옵시는 군권을 침손侵損할 행위가 유有하면 기이행미행其已行未行을 물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실失한 자로 인認할지니라.”

신민臣民, “신하된 인민”이라고 했다. 일본제국은 역내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만주인, 대만인, 베트남인, 필리핀인 들을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거느렸거니와, 신민, 언제 봐도 눈물겨운 말이다.
이하의 표현도 눈물겹다. 제국의 황제의 신하된 백성으로서 군주의 권력을 침해하는 자가 있다면, 그 행위가 구체적인 실제로 행해졌건 그러지 못했건 “대한제국 인민”에서 제외하겠다는 소리다. 이런 “배제의 수사”는 오늘까지도 우리와 함께하는 수사다―“빨갱이는 비국민非國民이다” “종북좌파는 대한민국을 떠나라.”

이하 제9조까지는, 온통 그 말과 뜻이, 입법-사법-행정-군통수-외교의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있음을 몇 겹으로 포개 말한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을 다시금 펼친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1899년 이후 1948년에 이르러, 드디어 위와 같은 한국어 문장이 출현하기까지, 53년이 걸렸다.

“전제정치”가 “민주공화국”으로 바뀌고, “신민”이 “국민”으로 바뀌고, 나아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선언을 획득하기까지 정말 힘들게도 살아왔다.
대한국의 신민에게 얹힌 봉건제의 질곡, 황국신민에게 얹힌 제국주의의 질곡, 역시 황국신민으로서 전쟁범죄의 종범으로 동원되어 떠안은-피수탈자로서 떠안은 파시즘의 질곡을 지나 해방을 맞기까지 정말 어려운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우리 역사의 간난신고가 끝나지 않았음은 2011년 8월 24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무상급식 지원범위”에 관한 서울특별시 주민투표>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끝]

 
*사진: 모두들 알다시피 대한제국 고종황제 폐하이시다.
*<대한국국제> 속 “공법公法”은 <만국공법萬國公法>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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