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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영대정잉묵>에는 연암이 경지에게 보낸 척독이 모두 세 편 남아 전한다. <영대정잉묵>의 편차상 경지에게 답한 첫 편지는 바로 앞 글 "<영대정잉묵> 속으로_1"에서 본 바와 같다.

다시, 바로 앞 글 말한 것처럼, “척독은 한마디로 “짧은 편지”이다.” 짧은 글로서, “전화기 없던 시대의 전화 통화였고, 인터넷망 없던 시대의 인스턴트 메신저 또는 트위터 또는 페이스북”이었다.

연안은 <영대정잉묵>에 부친 “자서”에서 일상생활에서 우러나온 글의 진솔함 및 주고받는 형식만이 담을 수 있는 표현상의 개성 들을 들어 척독의 문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이런 평가는 먼저 연암 자신이 척독마저 문학적 갈래로 소화한 ““척독가尺牘家”였기에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연암은 <영대정잉묵>의 “자서”에서 척독을 “봄날 숲속의 새소리, 난바다 신기루 속 보물, 연잎 위의 이슬, 초나라의 박옥[화씨지벽和氏之璧을 말함]” 들로 은유했다. 이런 데 비길 만한 수사에 품격마저 갖춘 척독을 남긴 이들에게는 “가家”를 허여해 “척독가”라는 호칭까지 마련했다. 다시 한 바퀴 도는 말이지만 먼저 연암 자신부터 “척독가”였다. 그렇다면 척독가 연암이, 척독 속에서 이룬 문장은 어땠는가. <영대정잉묵>에 수습된, 경지에게 보내는 두 번째 척독 속 한 줄을 보자.

경지에게서 어떤 편지가 왔기에 이런 답장을 썼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연암은 “문자나 글월로 표현되지 않는 문장”을 읽을 줄 모르는 엉성한 독서를 지적하는 데 뒤이어 이런 문장을 배치했다.
 

저 허공 속을 날고 우는 존재가 얼마나 생기가 발랄합니까. 그런데 싱겁게도 “새 조鳥” 한 글자로 뭉뚱그리고 말다니요. 그렇게 표현한다면 채색도 무시되는 것이고 그 모양과 소리도 빠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임에 나가는 시골 늙은이의 지팡이 끝에 새긴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彼空裡飛鳴. 何等生意. 而寂寞以一鳥字抹摋. 沒郤彩色. 遺落容聲. 奚异乎赴社邨翁杖頭之物耶.
_<경지에게 답함 2[답경지지이答京之之二]>에서

“새 조鳥” 한 자는 그저 생물종 “새”의 관념을 환기할 뿐이다. 이 한 자만으로는 비상과 노래의 생기발랄을 담을 수 없다. 산란한 빛을 따라 시시각각 달리 보이는 새 몸 표면의 색채도 표현할 수 없다. 그 운동감도 드러낼 수 없다. 이는 프랑스 인상파 그림쟁이들의 눈과도 일맥상통한다.

비상도 노래도 채색도 아우트라인도 텍스처도 무시된[沒郤] 채, “새[鳥]” 딱 한 글자로만 추상화된 새라니. 이는 나라에서 노인에게 경로의 뜻으로 지급하는, 대가리에 비둘기 장식 조각한 지팡이에 고착된 비둘기상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고착이다. 생기, 시간에 따른 변화, 운동감 들이 제거된 채의 “고착.” 연암은 자신의 글에 추상적 고착이 없기를 바란 글쟁이였다.
이런 것이다. 연암은 이런 글을 쓰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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