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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대정잉묵>은 새길 만한 경구의 밭이며, 기발한 수사의 밭이다.
연암은 때로 어린아이의 말이나 속담 따위를 활용해 이만한 경구와 수사를 만들어낸다. 또는 연암 특유의 문단 구성을 통해 장면이 극대화된 연극적인 경구와 수사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어린애들이 이런 노래를 부릅디다.
“도끼를 휘둘러 허공을 치느니 바늘로 눈동자를 겨누는 게 낫다.”
또 이런 속담이 있지요.
“정승을 사귀려 말고 네 몸가짐부터 신중히 하라.”
그대는 아무쪼록 명심하시오. 차라리 약한 듯 보여도 굳센 편이 낫지 용감한 체할 뿐 뒤가 물러서는 아니 되오. 더구나 남의 힘[권세]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孺子謠曰. 揮斧擊空. 不如持鍼擬瞳. 且里諺有之. 无交三公. 淑愼爾躬. 足下其志之. 寧爲弱固. 不可勇脆. 而况外勢之不可恃者乎.
_연암 박지원, <중일에게 보냄 3[여중일지삼與中一之三]> 전문

이런 데 연암 척독의 매력이 있다. 연암은 당시의 여느 교양인과 마찬가지로 고전의 인용과 압축을 통한 수사를 충분히 발휘하며 누리며 살았다. 동시에 생활 속에서 만난 어린아이의 말, 당시의 속담 또한 고전과 같은 심급에서 수사의 밑천으로 보기 좋게, 아주 잘, 효과적으로 써먹었다.
큰 동작으로 붕붕 날을 떨쳐 허공을 치는 도끼와 급소를 노린 채 틈을 엿보고 있는 바늘의 대조는 어떤가?
친구가 정승이라고 “나”가 정승인가? 스스로의 형편은 구차하기 이를 데 없는데, “나 누구랑 친해”를 입에 달고 사는 얼간이 군상은 우리와 함께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두 문단으로 앞을 다졌기에, “차라리 약한 듯 보여도 굳센 편이 낫지 용감한 체할 뿐 뒤가 물러서는 아니 되오[寧爲弱固. 不可勇脆]”의 다짐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 척독의 상대 “중일”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다.
 

마을 어린애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주다가, 읽기를 싫어해서는 안 된다고 나무랐더니, 그 애가 이렇게 대꾸합디다.
“하늘을 보면 푸르디푸른데 ‘하늘 천天’이란 글자는 푸르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읽기가 싫습니다.”
이 아이의 총명함이 창힐蒼頡의 기를 죽이는 듯하오.
里中孺子爲授千字文. 呵其厭讀. 曰. 視天蒼蒼. 天字不碧. 是以厭耳. 此兒聰明. 餒煞蒼頡.
_연암 박지원, <창애에게 답함 3[답창애지삼答蒼厓之三]> 전문

이 척독의 상대 창애는 곧 유한준(兪漢雋, 1732~1811, “창애蒼厓”는 호)이다. 유한준과 연암은 젊어서는 절친한 벗으로 지냈으나, 나중에 틀어졌다. <영대정잉묵>에 실려 있는 “창애에게 답함” 꼭지 가운데는 유한준의 아들 유만주(兪晩柱, 1755~1788)가 연암에게 글쓰기의 방법을 배우려 왔다가 언짢은 기색으로 돌아간 일을 기록한 척독도 있다.
둘 사이의 사연이 어떻게 되었든, 위 글을 읽고 나서 빙그레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앞서 “<영대정잉묵> 속으로_2”에서도 나는 “새” 대 글자 “조鳥”의 선명한 대비를 보았거니와, 여기서도 푸르디푸른 하늘 대 낱자일 뿐인 “천天”의 대비가 선명하다. 연암의 말대로 문자의 발명자로 회자되는 창힐의 기를 죽일 만한 한 장면이다.이 아이에게 “이놈아, 외우라면 외워!” 하고 회초리질을 하고 교과서를 읽혀야 할까? 오늘날의 교육자, 교사는 결코 그리 하지 않으리라.
아이가 말한 “푸르디푸른 하늘”을 살리되, 어떻게든 그 “푸르디푸른 하늘”에 “천天”까지 아울러 주기 위해 애쓰리라.


귀엣말일랑 듣지 말아야 할 것이며, 말이 샐까 경계하면서 하는 말일랑 하지 말아야 할 말이오. 남이 알까 두려운 일을 무엇 때문에 말하며, 무엇 때문에 듣는단 말이오?
말을 이미 해 놓고서도 다시 경계하는 것은 상대방을 의심하는 일입니다. 상대방을 의심하고도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附耳之言. 勿聽焉. 戒洩之談. 勿言焉. 猶恐人知. 奈何言之. 奈何聽之. 旣言而復戒. 是疑人也. 疑人而言之. 是不智也.
_연암 박지원, <중옥에게 답함[답중옥答仲玉]> 전문

한국어로 다시 새기느라 그렇지, 원문은 몇 자만으로 딱 떨어진다.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할 일, 애초에 받지 말았어야 할 일에 대한 경구에는 이미 시공을 초월하는 바를 보이고도 남음이 있다.
“중옥”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다.

시골 사람이 서울 사람 흉내를 내 봤자 결국 촌놈이오. 비유하면 술 취한 사람이 아무리 정색을 해 봤자 하는 짓이란 죄다 술 취한 자의 행동일 뿐인 것과 같지요. 이걸 몰라서는 안 됩니다.
鄕人京態. 摠是鄕闇. 譬如醉客正色. 無非醉事. 不可不知.
_연암 박지원, <아무개에게 보냄 2[여모지지이與某之二]> 전문


아프게 사람 찌르는 비유다. “나 안 취했어”를 연발하는 취객... 나사못회전도 그런 취객을 지어내곤 했다. “몰라서는 안 되[不可不知]”겠지만, 반드시 알아야겠지만, 그런데, 알고서야 그 부끄러운 짓을 했겠는가.
연암이 쓴 “촌놈[鄕闇]”이란, “시골 사람[鄕人]”에만 한하지 않는다. 연암은 사상이라야 유학 가운데서도 성리학의 좁은 범위에만, 세상이라 해야 조선 강역 안에만 갇혀 평생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다 갈 운명의 조선 지식인 모두를 “촌놈”으로 생각했다.
서울 가 본 놈하고 안 가 본 놈 싸우면 안 가 본이 이기게 마련이다. 이때 안 가 본 놈이 술까지 마시고 떨치고 나서면 어쩔 도리가 없다.

쓸쓸히 웃으며 <영대정잉묵>을 빠져 나온다. 이런 것이다. 연암은 다른 사람과 주고받을 때도 이런 글을 쓰고 있었다. [끝]

반남 박씨 집안에 전해오는 연암 박지원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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