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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 주신 문편(文編, 책으로 엮은 글)을 양치질하고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정중히 읽고 나서 말하오. 그대의 문장이 참 기발하오. 그러나 사물의 명칭에 차용이 많고, 인용이 딱 들어맞지 못하니 있으니 이 점이 옥에 티인가 하오. 그러니 노형을 위해 한마디 드리는 바요.
寄示文編. 漱口洗手. 莊讀以跪曰. 文章儘奇矣. 然名物多借. 引據未襯. 是爲圭瑕. 請爲老兄復之也.
_연암 박지원, <창애에게 답함[답창애答蒼厓]>에서

견줄 데 없이 정중하게 시작한 글이 어느새 바로 삼엄한 비평으로 접어들었다.
이 글은 연암이 당대의 문사로 유명했던 유한준(兪漢雋, 1732~1811, “창애蒼厓”는 호)에게 보낸 척독, <창애에게 답함>의 첫 문단이다.

<영대정잉묵>에는 연암이 유한준에게 보낸 척독이 모두 아홉 편이나 실려 있다. 그 가운데는 이미 본 <창애에게 답함 3>처럼 신선한 발상과 참신한 표현이 어울린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윽한 우정을 담은 경우도 있다. 그리고 지금 보는 것처럼 문학과 창작에 관해서는 이처럼 직언을 사양치 않은 경우도 있다.

직언은 이렇게 이어진다.

관호官號나 지명地名은 빌려다 써서는 아니 되오. 나무를 지고 다니면서 소금 사라고 외쳐 보시오. 하루 종일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장작 한 단 팔지 못할 것이오. 만일 제왕의 도읍지를 모두 “장안長安”이라 부르거나 역대의 삼공三公을 다 “승상丞相”이라 부른다면, 이름과 실제가 뒤죽박죽이 되어 도리어 속되고 비루하게 되고 마오.
官號地名. 不可相借. 擔柴而唱鹽. 雖終日行道. 不販一薪. 苟使皇居帝都. 皆稱長安. 歷代三公. 盡號丞相. 名實混淆. 還爲俚穢.
_연암 박지원, <창애에게 답함[답창애答蒼厓]>에서


그리고 <<맹자孟子>>를 인용해 “성은 모두가 함께 쓰는 것이지만 그 이름은 독자적인 것이며, 이는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문자는 모두가 함께 쓰는 것이지만 문장은 독자적인 것”임을 강조하며 척독을 여몄다.

곧다 못해 삼엄할 지경이다. 첫 문단 첫 문장에 “문편文編을 보았다” 했으니, 아마도 유한준은 이제까지 쓴 글 가운데 자못 자부심을 느낀 원고를 고르고 모아, 굳이 실로 꿰매 묶어 연암에게 보낸 모양이다. 한데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연암의 차남 박종채(朴宗采, 1780~1835)가 쓴 연암 일대기 <<과정록過庭錄>>에 따르면, 아버지(연암)의 친구 가운데 글을 잘한다는 소문은 났지만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친구가 있었다. 이 때문에 그 친구는 늘 아버지에게 유감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안의 현감으로 부임한 사이에 지방으로부터는 아버지가 오랑캐 복식을 하고 업무를 본다[胡服臨民]는 소문이 서울로 번지고, 아울러 <<열하일기>>에 대해서는 되놈의 연호를 사용한 글이라 하여 “노호지고虜胡之稿”라는 비난이 높아갔다. 이때 “글을 잘한다는 소문은 났지만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친구”란 바로 유한준이며, <<열하일기>> 비난 여론의 배후에도 유한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종채는 지금 보고 있는 <창애에게 답함>이 한때 우정으로 사귀었던 두 사람이 갈라선 한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비평을 받으려 한 쪽이, 진심에서 나온 직언을 구부림 없이 받아들였으면 좋았겠지만 사람의 일이 늘 서로서로에게 좋은 쪽으로만 풀리는 법은 없다. 이후 연암은 유한준이 건 산송(山訟, 묏자리 다툼에 따른 소송)에 얽혀 많은 곤란을 당했다.
박종채는 일련의 소송 또한 유한준이 아버지 연암을 괴롭히고 불명예를 안기기 위해, 계획적으로 꾸민 억지 소송으로 보았다(박종채는 그렇게 썼다. 유한준 측의 반론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이만 뭉뚱그린다).

둘러싼 이야기는 뜻밖에 복잡하다. 그러나 문학론으로 돌아가면 연암의 관점은 한결같고 분명하다. 연암은 시대의 차이를 무시한 채 고전 속의 명칭이나 고사를 끌어대는 데 급급한 태도를 비판한 뒤, 시대가 드러나는 독창적인 표현을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런 태도는 연암 약관에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를 관통한 문학 관점 및 방법론의 밑절미였다.

의고擬古적 방법론에 기울어 있던 유한준에게 “나무를 지고 다니면서 소금 사라고 외쳐 보시오. 하루 종일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장작 한 단 팔지 못할 것이오”는 정말 뼈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연암이 굳이 “장안”에 “승상”까지 예시했다면 유한준 문편에 담긴 의고의 그림자가 얼마나 짙었을지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장안長安은 한나라 고조가 처음 도읍한 이래 전진前秦, 전조前趙, 후진後秦,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隋, 당唐의 도읍이 되었던 곳이다. 그렇다고 “서울”을 “장안”으로 표현한들 서울에 다시 장안 역사의 더께며 시간의 깊이가 더해지겠는가.
아니다, 그건 우리 생각이고, 의고문가들은 진심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랬으므로 그들은 “제왕의 도읍지를 모두 ‘장안長安’이라’ 부르고도 남았다. 장안은 장안 역사의 더께며 시간의 깊이로 빛나고, 서울은 서울 역사의 더께며 시간의 깊이로 빛남을 생각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또 “역대의 삼공三公을 다 ‘승상丞相’이라 부”른다니 한번 따져보겠다.
삼공이란 원래 군주를 보좌해 군정 및 대권을 장악한 최고위 관리를 말한다. 보통 으뜸-버금-딸림의 짜임으로 세 자리를 할애하므로 삼공이라 한다.
각각의 자리에 대한 명칭, 곧 관호는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조선 시대 의정부의 삼정승인 영의정/좌의정/영의정이 삼공에 견줄 만한 예다.
승상은 중앙정권의 최고위직으로 황제를 도와 정무를 처리하는 으뜸 재상이다. 승상은 전국 시대 진秦이 처음 설치했다.
기원전 309년, 진秦의 무왕武王 2년 저리질樗里疾과 감무甘茂가 각각 좌승상, 우승상에 임명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승상”이 출현한다. 이후 진에서는 으뜸 재상으로 상국相國과 승상 두 자리가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
한제국 초기의 으뜸 재상은 상국이었으나 곧 승상으로 바꾼다. 서한西漢은 승상을 대사도大司徒로 개칭했으며, 동한東漢 말에 다시 승상으로 개칭한다.
삼국 시대에서부터 남북조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승상의 개폐가 무상했다. 있던 적도 있고 없앴던 적도 있어 일정치 않았다는 말이다. 당과 송은 승상을 폐지했다. 나중에, 송이 여진족이 세운 금金에 쫓겨 남송南宋을 세우고 나서, 남송 효종 때에 좌우승상이 부활한다. 중국에서는 이때부터 다시 재상을 일러 “승상”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제국도 좌우승상을 두었다. 그러나 명제국은 홍무제가 육부를 직할하느라 중서성中書省을 폐지할 때 승상도 함께 없애버렸다. 이호예병형공의 정무를 챙길 심산이었으니, 권력의 층계참인 승상은 홍무제에게 거추장스런 제도이자 기구였던 것이다.
말의 꼬리가 긴 중국 역사 자료는 태평천국太平天國이 정무와 관계가 없는, 관계官階에 지나지 않는 승상을 설치했다고 친절히 알려주고 있다. 이 꼬리 앞에서는 슬며시 웃음이 날 따름이다.

한마디 말이 담은 시간과 덩치가 꽤 된다. 의고문가들은 이 시간, 이 덩치의 어디를 살펴 도읍지는 다 장안이라 하고 삼공은 다 승상이라 할 수 있었을까.

아래 사진은 <<사기>>의 <육국연표六國年表>의 진 무왕 2년 부분이다. 사마천이 창안한 기전체 역사서의 한 틀인 연표의 얼개는 우리가 지금 잘 쓰고 있는 엑셀의 그것과 같다.
진 무왕 2년의 셀을 확인하시라! 연대와 함께 “처음 승상을 설치하다. 저리자, 감무가 승상이 되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의고문가들은 한 명칭이나 제도의 연혁, 내력, 추이 들의 실상에 관심은 있었을까? 글쎄, 글쎄? 암만해도 없었을 것 같다. 없었기 때문에 관념의 명령에 따라 의고의 세계에 저돌猪突했으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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