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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못회전의 방을 뒤지니 허난설헌에 관한 글이 네 편이 됩니다. 이 달 초순에는 모 잡지사의 부탁으로 허난설헌의 삶을 25매 분량 원고에 우겨넣기도 했는데요, 흩다가 우겨넣으니, 아쉽습니다. 아쉬운 길에 허난설헌이 나고 죽을 때까지를 죽 써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나사못회전의 방에 오른 허난설헌 관련 글.
http://theturnofthescrew.khan.kr/27
http://theturnofthescrew.khan.kr/18
http://theturnofthescrew.khan.kr/17
http://theturnofthescrew.khan.kr/11

 

이름, , , 그리고 시집을 남긴 여성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은 한국 문학사에서 손꼽히는 여성 시인입니다. 그가 살다 간 시대는 여성이 제 이름을 걸고 사회 활동을 하기가 불가능한 시대였지만, 허난설헌은 시인의 이상이 깃든 이름인 호뿐만 아니라 어릴 때 쓰던 이름, 어른이 되어 쓰는 이름인 자, 자신의 호가 제목으로 박힌 시집까지 세상에 남겼습니다.
허난설헌의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초희楚姬입니다. 자는 경번景樊이며 이 여러 이름 가운데 난설헌이라는 호가 가장 유명하지요. 그리고 <홍길동전>을 쓴 아우 허균이 엮은 헌난설헌의 시집은 그의 호를 딴 <난설헌집蘭雪軒集>입니다. <난설헌집>은 한국 문학사에서 여성 시인의 이름이 책 제목에 오른 첫 시집으로, 조선을 넘어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행되었습니다. 그냥 간행되고 만 것이 아니라 인기를 누리며 널리 읽혔습니다.
허난설헌은 개성이 넘치는 자신의 문학 세계 덕분에 옛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이름호는 물론 시집까지 남겼으며 외국에까지 그 이름을 떨친 것입니다.


강릉에서 태어나 서울로
허난설헌은 1563, 조선 명종 18년 강릉에서 태어나 오늘날의 강릉시 초당동에서 자랐습니다. 강릉은 예조참판을 지낸 허난설헌의 외할아버지 김광철金光轍의 고향인 데다, 아버지 허엽이 즐겨 처가로 와 독서를 하는가 하면, 1563년 삼척부사(당시에는 강릉대도호부가 삼척부와 양양부를 거느리고 있었음)로 부임한 인연까지 있었기 때문입니니다.
그런데 허난설헌의 강릉 외가는 허엽이 재취한 덕분에 생긴 인연입니다. 허엽은 첫 부인 청주 한씨가 일찍 죽는 바람에 다시 장가를 갔는데요, 청주 한씨는 장남이자 허난설헌의 큰오빠인 허성과 두 딸을 낳았습니다. 첫 부인이 죽은 뒤 허엽은 김광철의 따님인 강릉 김씨와 다시 혼인해 허난설헌을 낳았습니다. 강릉 김씨는 허난설헌의 작은오빠 허봉, 그리고 막내 허균까지 세 남매를 낳았습니다.

초당동에는 지금도 허난설헌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집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강릉의 명물 초당두부를 처음 빚은 이도 허엽이라고 하지요. 허엽은 허난설헌이 자란 초당리 집 앞 샘물로 콩을 가공하고, 가까운 바다에서 간수를 받아 두부를 빚었다고 하는데요 허엽의 호가 바로 초당草堂입니다.
이후 허난설헌은 다섯 살 또는 일곱 살 때쯤, 중앙직을 맡게 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합니다. 서울 집은 한성부 건천동(乾川洞, 마른내골), 그러니까 오늘날의 서울 중구 인현동 명보극장 일대에 있었고 허난설헌은 출가하기 전까지 여기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사족이지만, 이순신 장군 또한 1545년 건천동에서 태어나, 건천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답니다.


허난설헌의 집안
이제 허난설헌의 집안을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허난설헌의 아버지는 허엽(許曄, 1517~1589)은 조선 중기의 명문가 양천 허씨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허엽은 조선 사람들이 명예롭게 여긴 벼슬인 대사성, 지방직으로서는 가장 높은 벼슬인 관찰사 등의 벼슬을 두루 지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가독서(賜暇讀書, 명망 있는 문신에게만 허락되는 연구 기간. 임금의 격려를 받음)를 하는가 하면, 중국에 사신을 다녀왔으며, 정치판에서는 김효원과 함께 동인의 우두머리 노릇을 한 당대의 명사입니다. 벼슬과 그 밖의 영예, 정치 지도자로서의 명망 등 모든 점에서 우뚝했던 것입니다.

허엽이 유명한 인물이라고 했지만 세 아들도 못잖은 인물들이었습니다.
먼저 허난설헌의 큰오빠 허성(許筬, 1548~1612) 또한 고위직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에 이른 명사로 선조 임금의 임종까지 지킨 대신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에 사신을 다녀왔습니다.

작은오빠 허봉(許篈, 1551~1588)은 아버지 허엽과 함께 동인의 선봉이 되어 당시 정치를 주름잡던 인물입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중국에 사신을 다녀왔으며 이이와 대립한 끝에, 1584년 함경도 종성에 유배 갔다 풀린 뒤로는 방랑 생활을 하다가 금강산에서 죽었습니다.

여섯 살 아래 아우 허균(許筠, 1569~1618) 또한 너무나도 유명한 인물이지요. 허균 또한 중국에 사신을 다녀왔으며 중국 사신이 조선에 오면 중국 사신을 상대해 외교를 도맡았던 인물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권력의 한가운데서 실력을 뽐낼 수 있었던 허균은, 그러나 천성이 호방하고 거침이 없어서 자잘한 예교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사상 면에서는 불교, 도교, 서학에 두루 관심을 보였고, 현실 정치에서는 이상론에 바탕한 개혁주의를 강하게 드러냈습니다.
문학에서도 남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빼어난 작가였을 뿐 아니라, 빼어난 비평가이기도 했던 허균은 누이 허난설헌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여성 작가들도 남성 작가들과 똑같은 비평 대상으로 대했습니다. 여성 작가를 공평하게 다룬 비평 태도는 조선 시대를 통틀어 드문 것이었습니다.

남의 집안 자랑을 뭐 그리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느냐 하시겠지만, 다른 무엇보다, 이 똑똑하고 잘난 집안이, 툭 터진 마음으로  여성인 허난설헌으로 하여금 문학을 공부하며 높은 교양을 쌓을 기회를 주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작은오빠 허봉은 허난설헌을 끔찍이 아꼈습니다. 허봉은 허난설헌에게 시집이나 문방구를 선물하며 시 열심히 쓰라” “공부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안부를 아름다운 시에 담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자신의 친구이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이달에게 허균의 문학 공부를 맡길 때에 허난설헌도 함께 배우도록 했습니다. 여성이 공부를 하면 건방지다’ ‘되바라졌다는 욕을 먹기 일쑤였던 시대에 허봉은 누이의 공부를 위해 베풀 수 있는 모든 것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여섯 살 아래 아우인 허균 또한 누나와 누나의 문학을 아꼈습니다. 허균은 누나의 삶을 기록했고 누나의 삶을 안타까워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글을 모두 불사르라는 누나의 유언을 어기고 <난설헌집>을 엮은 이도 허균이고, 조선에 온 중국인들에 허난설헌의 작품을 알린 사람도 허균입니다. [계속]

사진_21세기의 명품 허난설헌 작품 번역, <스물일곱 송이 붉은 연꽃>(이경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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