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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요? 재미없잖아요. 수술이나 요리처럼 다이내믹한 볼거리를 만들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시청자들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아요.”

몇년 전 만났던 한 드라마 작가는 단호하게 말했다. ‘재미있게 못 만들면서 남 탓은….’ 빈정은 좀 상했지만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그동안 국내에서 방송됐던 드라마나 영화 중 기자가 전면에 나섰던 작품 치고 인기를 끌었던 사례를 찾기 힘들다. 드라마 <스포트라이트> <히어로>, 영화 <모비딕> 등은 시청률이나 흥행면에서 형편없었다. 손예진과 김민희, 지진희, 이준기 등 내로라하는 톱스타도 소용없었다. 물론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에 등장했던 기자들도 있긴 하다. 기득권에 매수돼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리는 악의 세력이거나 스토커에 가까운 민폐형 캐릭터 일색이었다. 그도 아니면 그저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선남선녀 연애담의 주인공에 머물렀다. 국내 드라마 제작여건상 기자는 다른 직업군에 비해 선호되는 소재는 아니다. 시각적 표현이 어렵고, 무엇보다 탄탄한 이야기 구조를 갖춰야 하는데 쉽지 않다. 정의를 위해 거대악과 맞서는 엉성한 기자이야기에 시청자들은 썩 몰입하지 못했다. 스마트폰만 열면 쏟아지는 기사와 정보의 홍수 시대에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기기도 어렵다.

MBC 드라마 '스포트라이트'에 출연한 배우 지진희, 손예진 (출처 : 경향DB)


주변인에 머물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기자가 요즘 다시 대중문화계에서 주요한 소재로 부상했다. 다음달부터 방송될 드라마 두 편은 모두 기자가 주인공이다. 요즘 ‘대세’라는 이종석·박신혜가 사회부 기자를 연기할 <피노키오>, 유지태가 방송기자로 등장하는 <힐러> 등이다. 개봉을 앞둔 영화 <내부자들>, 기획단계에 있는 영화 <저널리스트>도 언론계가 주요 배경이다. 언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급증한 걸까. 기자라는 직업이 갑자기 선망의 대상으로 바뀐 걸까.

이 같은 현상은 역설적으로 ‘기레기’(기자와 쓰레기를 합한 신조어)의 창궐에 기인한다. 몇년 전 등장했던 이 말은 일시적 유행어로 끝나지 않고 기자를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되어가고 있다.

지금처럼 언론의 실체와 속성이 속속들이 까발려진 적도 없었다. 대중은 권력의 재갈이 물린 언론이 어떻게 망가졌는지를 지켜봤고, 언론이 본질은 외면한 채 자신의 입맛대로 사안을 왜곡하고 편집하는 행태를 매일 목도하고 있다. 자극적인 내용으로 침소봉대하며 호들갑 떠는 언론에 사람들은 이미 넌더리가 난 지 오래다. 최근 몇년 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끔찍한 사건과 의혹 앞에서 기성 언론은 무력했다. 언론 신뢰도는 바닥에 떨어졌고, 진실과 실체가 자취를 감춘 자리에 오해와 불신만 쌓였다. 진실을 좇는 것이 기자의 사명이자 책임이라는 명제 앞에서 기레기가 아닌 기자는 많지 않아 보인다. 나 역시 기레기 창궐에 일조했다.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덕분에 누구나 기자역할을 할 수 있게 됐고 정보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해졌다. 그러나 진실을 향한 대중의 갈망은 그만큼 더 간절하고 깊어지고 있다. 대중문화가 당대 대중의 관심과 욕구를 반영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최근 대중문화계의 트렌드에서 대중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는 뚜렷이 드러난다.

요즘 영화 <제보자>와 드라마 <비밀의 문>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은 숨겨진 진실을 밝히고 훼손된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주인공들의 고군분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다른 작품들 역시 진실을 좇는 기자들의 모습에 방점이 찍힐 테고 드라마가 선사하는 판타지를 통해 시청자들은 위로와 쾌감을 얻을 것이다. 문제는 그 위로와 쾌감의 깊이만큼 불편하고 불투명한 현실에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박경은 대중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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