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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신 몸’이라는 유행어를 남긴 ‘가짜 이강석’은 자유당 시절을 풍미했던 유명한 사건이다. 이강석은 당대 권력자인 이기붕의 아들로 뒤늦게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들어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를 닮은 가짜 인물이 경북 일대를 휘젓고 다니며 지방 유지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가 들통 난 게 이 사건의 실체다. 가짜인 줄도 모른 채 “나 이강석인데…”라는 말 한마디에 부패한 지방 관료들은 버선발로 쫓아 나와 그에게 수재의연금까지 털어 바쳤다.

반세기 만에 비슷한 사건이 재연됐다. 어제 검찰에 구속된 조모씨(52)는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사칭해 대기업을 농락했다. 검찰의 공소장을 보면 조씨는 지난해 7월 대우건설 박영식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재만입니다. 조모씨를 보낼 테니 취업을 시켜주면 좋겠다”고 했다. 이튿날 박 사장을 찾아간 조씨는 별다른 절차 없이 회사에 취직해 1년간 부장으로 일했다. 이 회사를 그만둔 뒤에는 KT 황창규 회장에게 같은 수법으로 전화를 걸어 취업을 부탁했다. 황 회장은 직원들에게 조씨의 취업 절차를 밟으라고 하면서 청와대에 확인 전화를 해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가짜 이강석'이 아직도 통하는 사회 (출처 : 경향DB)


결국 사기행각이 드러나긴 했지만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청와대 금고지기인 이 비서관은 자타가 공인하는 박근혜 정권의 실력자 중 한 명이다. 총무비서관 전화 한 통화에 모든 게 일사천리인 세태는 뭘 말하는가. 박 대통령은 취임 후 청와대 직원들에게 청렴과 봉사를 강조했지만 청와대가 불미스러운 사건에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다. 더구나 가짜 실력자에게 놀아난 대기업들은 또 뭔가. 대우건설과 KT는 민간 기업이지만 주인 없는 회사라는 점에서 경영진 선임 과정에 청와대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더 뒷맛이 개운치 않다.

조씨는 구속됐지만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가 생면부지라는 이 비서관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고 실력자 행세를 했는지 의문이다. 대기업 최고경영자가 전화번호도 다른 가짜 인물에게 속아 별다른 확인 절차 없이 일자리를 알아봐줬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혹 이 비서관 주변 인물이 개입했다면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검찰은 보강 수사를 통해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청와대도 이번 사건을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비단 공기업뿐 아니라 멀쩡한 민간기업들마저 “청와대 민원만 없으면 회장 노릇 할 만하다”는 소리가 왜 나오는지 귀 기울여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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