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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이과 계통의 대학원을 다니던 동생이 자주 늘어놓던 푸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 중 하나는 고가(高價)의 분석 장비가 잘 돌아가는지 살피는 일이었는데, 그저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한두 가지 기본적인 단추를 조작하거나 계기판을 보면서 혹시 문제가 일어나면 전문 기사에게 연락을 돌리는 일 정도였다. 보통은 아무 일도 안 일어나기 때문에 그야말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어딘가에 불이 켜지면, 무의미한 존재로서의 오랜 침묵을 깨고 기계를 돌보는 역할을 잠시 발휘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 어떤 능력이나 기술과 무관한, 그저 살아있기만 하면 되는 역할일 뿐이었다.

내 동생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기분을 잘 안다. 너무나도 단순한 노동을 하는 그 지루함과 무료함과 비참함. 나 대신 기계를 쓰지 않는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내가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상황을 인지하며 변화를 지각하는 생물이기에 그에 따른 적절한 반응을 할 수 있으며, 그것만으로도 그 어떤 정교한 첨단기계도 능가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술의 발전과 생산비용의 감소로 나는 언젠가 기계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일들이 자동화됨으로써 일자리가 사라지기도 한 세상 아닌가. 하지만 여전히 이 사회는 생물만이 가진 인지 및 판단능력이 요긴하게 쓰이는 곳으로, 비록 그 생물한테는 지극히 단순한 일일지라도 기계에 맡기기엔 어렵거나, 부적절하거나, 못 미더운 일들에는 사람이 배치되고 있다. 하다못해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렇더라도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에겐 고욕이다. 자신이 생명으로서 보유한 감각기관의 섬세함과 민감함은 이런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다 의미 있고 보람된 일에 이 나의 생리기능들이 동원될 수만 있다면! 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생물의 오장육부는 불만족에 꿈틀거린다. 멍하니 계기판을 바라보거나, 무슨 스위치를 내렸다 올렸다 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지 않은가.


진도개로 유명한 진도. 그래서인지 진도에는 개가 많다._경향DB



그래서 그저 성능 좋은 기계 수준의 노동력으로 취급받을 때 인간은 심히 괴롭다. 자동응답시스템 대신에 전화 받는 일만 맡은 자가 미치겠다는 이유는 일이 반복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나의 기본적인 ‘생체작용’이 노동으로써 착취당하고, 나의 존재가 나의 ‘생리’로 축소되기 때문이다. 귀가 있으니 전화벨을 듣고, 손이 있으니 수화기를 들고, 입이 있으니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살아있는 게 죄인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는 인간만이 아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동식물들이 자신의 평생을 바쳐 인간에게 서비스하다가 이 세상을 떠났고 또 떠나고 있다. 모든 생물은 어차피 누군가의 먹이다. 물론 어떻게 먹이가 되느냐는 무척 중요하다. 여기서의 문제는 갈 때 가더라도, 그들의 원초적인 생리가 착취의 대상이 되고, 더 살려면 살수록 더 착취된다는 데에 있다.

가령 집 앞에 줄로 묶어놓은 개는 개의 본성 때문에 외부로부터 접근하는 모든 ‘낌새’를 향해 짖는다. 개의 기본적인 생리인 이 경계행동이 집을 침입자로부터 지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경보기능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감각이 더 살아있는 개일수록 더 잘 짖고 따라서 더 잘 지킨다.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 그 개의 줄은 풀어지지도 길어지지도 않는다.

식구의 한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어딘가에 묶여 길러지는 모든 개는 자신의 생명활동 자체가 경보시스템으로서 착취당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좁은 새장에 가둔 새는 노래기능을, 열악한 수조 안에 갇힌 물고기는 관상기능을 착취당하고 있다. 할 게 아무것도 없는 새장 속 카나리아는 열심히 울어보기라도 한다. 그러나 울기 때문에 새장의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행해지는 가마우지 낚시는 생리적 착취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사례이다. 고기잡이 귀신인 가마우지는 신나게 물속으로 뛰어들어 먹잇감을 잡지만, 이상하게 삼킬 수가 없다. 주인이 목을 줄로 조여놨기 때문이다. 꿀꺽하지 못한 물고기는 고스란히 주인의 바구니에 쌓이지만 바보 같은 가마우지는 이 짓을 반복해서 할 뿐이다. 자신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광경이 낯선 현대사회에서도 생리적 착취는 매일, 대규모로 자행된다. 횟집 앞 수조에는 온갖 종류의 생선, 갑각류, 연체동물이 물건처럼 포개져 있다. 왜 죽이지 않고 저렇게 두는가? 바로 그들의 목숨이 그들의 유통수단이기 때문이다. 싱싱함이 생명인 해산물은 가까스로 숨이 붙어 있도록 두면 죽어서 썩지 않기 때문이다. 즉, 물고기와 오징어와 대게의 호흡활동 자체가 저장기능으로서 착취당하고 있는 것이다. 진나라 때 차윤이 비단주머니에 수십마리의 반딧불을 모아 그 빛으로 글을 읽었다 하여 그 고생과 보람을 가리켜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 한다. 따지고 보면 반딧불들 역시 발광(發光)기능이 착취된 것 아닌가? 그래도 그 시절에는 자유로운 반딧불이라도 많았으리라. 아니 글을 다 읽은 다음 다 풀어줬을 거야. 야생학교는 믿고 싶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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