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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의 휴가를 맞이해서 어딘가로 떠나는 여행. 그 여정 속에서 나는 자리 앞에 비치된 잡지를 하나 펴든다. 이국적인 꿈의 행선지가 소개된 기사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언젠가 나도 저곳에 가보겠지 야무진 다짐을 해보기도 한다. 광고조차 탐독하며 음미하지만, 한 가지에서 늘 눈살이 찌푸려진다. 뭔고 하니, 한국에 대한 글이나 사진의 비현실성을 마주했을 때이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여유와 풍류가 넘치는 문화와 사회, 전통과 현대의 자연스러운 조화, 잘 보존된 태곳적 자연 등등. 이건 현재 내 나라의 얘기가 아니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대표성을 지닌 묘사는 분명히 아니다. 굳이 추한 면을 내세울 것도 없지만, 줄기차게 우리의 극히 일부분이나 과거만을 추려서 선전할 노릇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이내 잡지를 덮고 만다.

휴우. 우리는 누군가. 오늘날 한국이라는 실체를 구성하는 우리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나는 자문해본다. 어차피 도착하려면 시간도 한참 남았고 특별히 할 일도 없다. 세 가지 특징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른다. 첫 번째는 미래이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보다 미래가 중요한 사람들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며, 인생의 모든 시기는 그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데 얼마나 잘 쓰였는지에 따라 평가된다. 고등학교는 대학교를 위해 완전히 복속되는 기간이라는 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고등학생으로서의 ‘생활’이란 없다. 대학의 준비단계로서만 정의될 뿐이다. 대학은 잠시 ‘대학생활’이라는 시기를 갖지만, 곧 취직을 위해 헌납된다. 어렵사리 취직에 성공해도 현재를 즐길 여유는 없다. 승진하려면 지금 더 성과를 내야 하고 또 다가올 결혼 준비에 오늘 박차를 가해야 한다. 결혼 후에는 출산, 출산 후에는 교육, 교육의 두 번째 바퀴가 시작된다. 그리고 노후. 자동차나 부동산을 살 때에도 나중에 팔 때의 가치가 구매결정에 1순위 기준으로 작용한다. 미래의 그림자가 너무 큰 나머지 현재를 완전히 집어삼킨다. 압도적인 미래의 나라.

두 번째는 연결이다. 예부터도 사돈의 팔촌까지 일일이 촌수를 세어가며 사람들 간의 연결과 관계에 유난히 민감했던 우리이다. 평균 3.6명을 거치면 모두가 아는 사이라는 우리는 오래된 혈연, 지연, 학연의 관습과 더불어 지금은 통신망에 대한 열성과 집착이 우리 사회의 연결망을 더욱 촘촘하고 세게 조이고 있다. 모든 국민은 자신의 통신 단말기에 고개를 처박고 하루를 보내며, 차마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양의 인터넷 콘텐츠를 매일 산소처럼 소비하며 산다. 연인들은 상호 간의 연결 상태를 아예 끊는 법이 없이 깨어 있는 시간은 거의 모두 문자와 전화를 주고받는다. 안테나나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곳에 들어서면 마치 공기가 더 이상 공급되지 않는 듯한 공포와 불안감에 떨며 모두들 어머니 품과 같은 전파신호를 찾는 데 여념이 없다. 해외로 나갈 때에도 로밍이나 데이터는 필수이고, 어디서 뭘 하든 그 활동은 페이스북에 올려야 완성된다. 물 샐 틈 없는 연결의 나라.



세 번째는 변화이다. 한국에서 나오는 광고의 절대다수는 “아직도 ○○을 하고 계십니까?”로 소비자를 훈계, 설득, 협박한다. 멀쩡히 사용하고 있던 물건이나 서비스라 하더라도 가만히 옛것에 머물러 있다면 이미 구시대적인 것이다. 국가의 슬로건인 ‘다이내믹 코리아’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상점과 건물은 생겨졌다 없어졌다 하고, 공사에 시달리지 않는 동네가 없다. 다시 뜯고 고치고 바꾸지 않으면 성미에 안 차는지, 얼굴이나 몸매도 가만 놔두지 않는다. 유행의 엄청난 진행 속도는 웬만한 대상, 표현, 양식을 금세 구닥다리로 만들어버리고 다음 타깃으로 옮긴다. “한창 떠들썩하더니 이젠 쑥 들어갔네!”라는 말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 단 하나도 없는 변화의 쳇바퀴 속에서 모두가 달리고 있다. 몰아치는 변화의 나라.

공교롭게도 지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이 세 가지이다.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에 처한 지구를 구하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덕목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당장 오늘을 벗어나 후손들에게 물려줄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나와 인간은 자연과 생태계의 커다란 그물망에 모두 연결된 상호 의존적인 신세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수습 불가능해지기 전에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전 세계의 지구와 환경을 걱정하는 모든 활동가와 단체는 이 세 가지를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로 우리가 지구를 구하는 데 제격인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니다. 미래와 연결과 변화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게 우리인데, 유독 지구와 환경을 위해서는 입 딱 씻고 이 세 가지 특징을 전혀 발휘하지 않는다. 사상 최악의 중부지방 가뭄으로 주요 용수원인 보령댐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충남의 8지역이 절수에 들어갔지만 지하수를 끌어 쓸 생각만 했지, 근본적인 원인인 기후변화에는 여전히 나 몰라라 한다. 정말 눈을 감고 그냥 이대로 갈 것인가, 경제라는 핑계로 근본적인 무(無)대응을 합리화할 것인가. 야생학교는 심려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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