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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아는 교수님이 소설책을 번역해서 보냈다. 역자가 둘이다. 그분은 원래 부부 교수님인데, 한 분은 영문학자, 한 분은 역사학자다. 두 분이 번역했겠거니 했는데, 역자 중 한 사람은 아드님이란다. 참으로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행복하겠구나 싶었다.

책을 훑어보니, 한 페이지는 인쇄가 되어 있고, 한 페이지는 인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파본이다. 서점에서 산 책이라면 당장 바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증받은 책을 파본이라며 돌려보내고 다시 새 책을 달라고 한다면, 뭔가 좀 이상한 것 같다. 그래서 서가에 꽂아두고 내쳐 그냥 두었다. 뒤에 그 교수님을 만나 책을 보내주어 고맙다 하고 책의 상태가 그랬다고 하니, 깜짝 놀라면서 새 책을 보내주겠다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아니 파본이니까 그냥 갖겠다고 우겼다. 왜냐? 이 책이 혹 아는가? 이 책이 뒷날 유명해져서 에러우표처럼 엄청난 값을 받게 될지? 하하!

파본일 수도 있다면서 책을 사면 꼭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겨가며 검토하는 분도 보았다. 자신이 못하면 학생을 시켜서라도 꼭 확인하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깐깐할까 하고 생각했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과거 책들은 그럴 만도 했다. 인쇄나 제본 기술이 시원치 않았을 때 종종 인쇄되지 않은 페이지, 중복된 페이지, 없는 페이지가 드물지 않게 있었던 것이다. 그분의 깐깐한 행동도 이해가 되었다.

이런 불구의 책을 파본이라 한다. 파본을 종종 경험하는 터이다.

한 번은 학교 앞 서점에서 책을 사서 붉은 색연필로 줄을 그으며 신나게 읽고 있는데, 어라, 갑자기 내용이 튄다.

전후를 꼼꼼히 훑어보니 몇 페이지가 빠졌다. 서점에 가지고 갔더니 두말 하지 않고 바꾸어준다. 또 책날개에 보면 ‘파본은 바꾸어드립니다’라고 적어두고 있으니 요즘은 파본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정작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것은 이빨 빠진 고서다.

서울의 모 대학 도서관에 꼭 필요한 책이 있어 중간에 사람을 넣어 복사를 부탁했다. 며칠을 기다리는데 아주 감질이 났다. 드디어 복사본이 도착했다. 허겁지겁 자료를 훑어보는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원했던 자료가 있는 책만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10권 5책의 고서라면 10권은 내용상의 분류고, 5책은 형태상의 분류다. 그런데 내가 보고자 했던 것은 4책의 8권에 있는데, 4책이 없는 것이다. 목록에는 5책이 다 있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4책이 사라진 것이다.

다시 같은 책을 소장하고 있는 다른 도서관과 접촉해서 복사를 했다. 그런데 이게 또 어찌된 일인가. 그쪽 사본에도 역시 내가 원하는 부분이 있는 책만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 책의 중요 부분을 안 사람이 빌린 뒤 반납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이가 빠진 책을 낙질본이라고 한다. 희한하게도 내가 보고자 하는 내용이 낙질 속에 있었던 경우가 자주 있었다. 박사과정 때도 도서관에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책이 있는 것을 알고 신청을 하면, 종종 망실되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건 나만의 경험인가?

최근에는 고서가 아닌 책에서도 동일한 경험을 했다. 부산대 도서관에 <부산대학교 10년사>란 책이 있다. 나는 2005년 부산대학교 60년사를 편찬할 때 편찬위원으로 참가해서 한 꼭지를 썼다. 그때 교사자료관(校史資料館)에서 필요한 기본 자료를 건네주었다.

아주 간단한 것을 예로 들자면, 부산대학교 50년사, 40년사, 30년사, 20년사, 10년사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946~1956년의 10년간 역사를 정리한 10년사였다. 부등사판을 긁어 갱지에 인쇄한 이 책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 내용은 너무나도 흥미롭다. 해방 직후 부산에 대학을 설립하고자 했던 부산 시민들, 그리고 그야말로 적빈(赤貧)의 상황 속에서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선각(先覺)들, 좌우 대립, 6·25전쟁기의 전시대학(戰時大學) 등 어느 것 하나 귀중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특히 국가에서 국비를 지원한 것이 아니라, 민간에서 자금을 모아 국가에 헌납한 뒤 그것을 국비로 다시 내려주는 형식을 통해 부산대학교를 건립했다는 이야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또 어떤 유명한 기업인이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의 설립에 기부금을 내기로 약속했다가 지키지 않고 뒷날 선거에 나와 자신의 업적을 묻는 사람에게 부산대학교에 기부금을 냈노라고 거짓말한 것까지 적어 놓고 있다. 요컨대 지금처럼 예비취업생을 길러내는 대학이 아니라,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진지한 열정이 넘쳤던 대학의 모습을 <십년사>를 통해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무미건조한 계량적인 역사가 아닌 이야기체의 서술도 너무나 흥미로웠다.

<십년사>는 이미 부산사(釜山史)의 일부를 이루고 한편으로는 한국 대학사(大學史)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단 한 부밖에 없는 귀중한 책이기에 혹시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하는 마음에 부본(副本)을 만들려고 했다.

책을 복사한 뒤 돌려주고 복사한 것을 대본으로 한글파일로 옮겼다. 깨끗이 교정을 보고 출력을 했더니, 아주 깔끔하게 되었다. 출판사에서 내줄 리 만무한 책이니 언젠가 형편이 돌아가면 내가 개인적으로라도 주해를 달아 소량 제작하기로 하고, 몇몇 관심 있는 분들에게 출력해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십년사>에는 결정적인 흠이 있었다. 여러 페이지가 누락된 파본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제본할 때 실수로 몇 페이지가 빠진 것 같았다. 은퇴하신 노교수님들에게 여쭈어보는 등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온전한 책을 구할 수 없었다. <십년사>를 낸 것이 1956년이니 교수며 학생이 수백명에 불과한 시절이었다. <십년사>를 간행해도 얼마나 간행했을 것인가. 또 이런 책일수록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니 사라진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교사자료관에 있는 책이 유일한 것이다. 이럴 경우 다시 책을 찍는다 해도 빠진 부분을 채워 넣지 못하고 만다. 불구의 책이 되는 것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파본은 정말 더할 수 없는 형벌인 셈이다. 책 만드시는 분들에게 부탁하노니, 제발 파본만은 말아 주시기를!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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