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4년 전 초여름 대선 경선에 나온 야당의 한 후보가 ‘저녁이 있는 삶’을 주창했다. 이 때문에 설레던 이들이 꽤 많았지만 더 많은 돈을 욕망하느라 ‘삶을 삼킨 저녁’은 달라지지 않았다. 2년 전 가을 나는 이 지면에 ‘저녁은 이미 넘쳐나고 있다’는 칼럼을 썼다. 무연무업(無緣無業) 인구가 급증한 사회의 ‘넘쳐나는 저녁’엔 불안과 고독이 미세먼지처럼 가득했다. “완전히 다른 상상이 절실”하다고 글을 마쳤지만 돌아보면 상상은 태부족했다. 그러다 지난 5월17일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의 주점 화장실에서 살인 범죄가 벌어졌다. 5월28일엔 구의역 9-4지점 승강장에서 사망사고가 일어났다. 두 사건을 접하면서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내 감정과 생각은 곤두박질쳤다.

구의역 9-4지점 승강장에서 홀로 안전문을 수리하다 사망한 사람은 외주 정비업체에 입사한 지 8개월 된 19세 남성이었다. 경찰은 열차 통제의 책임을 가진 서울메트로 전자운영실, 현장 관리의 책임을 가진 역무실, 2인1조 수칙의 책임을 가진 외주업체를 조사해 죽음에 대한 “구조적 책임”을 밝히겠다고 발표했다.

수사를 통해 ‘죽음의 책임구조’가 가려진다 해도 장례를 미룬 가족과 지인에게 그의 19년에 걸친 ‘삶의 책임구조’는 하나도 밝혀지지 않는다. 부친에 따르면 늘 격무에 시달린 그는 “씻지도 못하고 집에 오면 바로 곯아떨어”졌어도 비번날에 고용승계 집회에 참석할 만큼 정규직의 꿈을 갖고 있었다. 퇴근 행렬이 시작되기 직전인 오후 5시57분에 숨진 그의 가방에선 여러 공구와 함께 뜯지 못한 컵라면이 나왔다.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의 주점 화장실에서 살해당한 사람은 23세 여성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그녀를 주방용 식칼로 살해한 범인은 다른 주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34세 남성이었다.




이 사건은 여성혐오를 공론화한 추모운동과 정신질환자 관리 실태를 비롯해 공용화장실의 범죄 취약성까지 여러 문제를 부각시켰다. 이중 범죄 원인을 두고 남성에게 만연한 여성혐오와 조현병자의 피해망상으로 쟁점이 형성됐지만 둘 다 ‘죽음의 책임구조’를 밝히는 차원이다. 친구와 주점에서 저녁시간을 보내다 오전 1시7분에 화장실에 가서 살해당한 23세의 여성의 삶과, 0시33분부터 누군지도 모를 사람을 죽이기 위해 식칼을 들고 사회적 약자를 기다린 34세 남성의 삶, 그 ‘삶의 책임구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다.

이렇듯 19세 비정규직 남성의 오후 5시57분, 23세 여대생의 오전 1시7분, 34세 범인 남성의 0시33분은 저녁에서 새벽에 걸쳐 구의역과 강남역 사이의 20분 남짓 거리를 두고 죽음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들 죽음의 책임이 알지 못하는 ‘너 때문’으로 치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주업체와 역무실과 전자운영실로 연결돼 있어도 알지 못하는 너와 나 사이에 들이닥친 불행의 표면적 인과만 밝힐 뿐 그 구조를 설계하고 만들고 관리하는 구조 운영자들은 늘 면죄됐다.

이렇게까지 망가진 것은 우리가 ‘삶의 책임구조’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관계로부터 면책되길 바라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괴물의 탄생에 합의하고는 나만 괴롭히지 않으면 된다고 착각했던 업보가 아니면 뭘까 싶다.

더 많은 돈을 갖는 것이 삶이라 믿는 동안 강남역과 구의역 사이에서 ‘삶의 책임구조’는 실종됐다. 이렇게 ‘삶의 책임구조’에서 자유로워진 만큼 ‘죽음의 책임구조’와도 무관해진 국가와 기업은 더 많은 권력과 돈을 취했을 뿐이다. ‘저녁을 방치하는 국가’와 ‘저녁을 주는 기업’만 작동된다면 삶과 죽음의 책임은 개인에게 외주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무책임의 구조를 운영하는 정치와 경제라면 일명 ‘칼퇴근법’을 제정한들 무너진 중산층과 하루벌이 서민의 저녁에는 삶이 깃들 수 없다.

5월30일 20대 국회가 시작됐다. 한 일간지는 “132개의 초심”이란 머리기사를 통해 초선 의원들의 입법 포부를 깨알같이 소개했다. 하나하나가 각종 비타민처럼 소중하나 모아놓으면 종합비타민 같아서 꼭 그것이어야 한다는 공감으로 다가오기 쉽지 않다. ‘저런 세상이 올 수 있구나’ 하는 큰 실감을 주는 정치가 무엇인지 뜻을 모아야 한다. 그러자면 예컨대 30대 재벌 269개사의 753조원이 넘는 사내보유금을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를 밝히는 정치여야 한다. 경제활동의 이익이 조세회피처로 빠져나가지 않고 지역공동체에서 순환하게끔 법과 제도를 바꾸는 정치여야 한다.

이렇게 희망의 정치를 쌓아올리는 과정을 통해 대선을 맞이해야 한다. 강남역과 구의역을 잇는 젊은이와 시민들의 추모 행렬에 담긴 ‘삶의 연대구조’를 국가와 기업에도 ‘삶의 책임구조’로 강제하겠다고 공약하는 대선 후보가 나와야 한다. 그럴 때 국민은 행복한 저녁을 더 많이 상상할 수 있고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삶의 책임구조’를 함께 만들겠노라 행동할 수 있다. 다음 대선은 강남역과 구의역 사이의 저녁에 달려 있다. 불과 1년7개월 뒤면 대선이다.



강명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