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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대학에 근무하는 친구가 나더러 자기들 모임에 좀 나와 줄 수 없느냐고 부탁을 한다. 무슨 모임인가 물었더니 책읽기 모임이란다. 한 달에 한 번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모임으로 마침 내가 쓴 책을 읽고 토론을 할 예정인데, 그 친구가 저자가 친구라고 했더니 모임에서 불러서 같이 얘기를 해보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친구는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그 모임 역시 같은 자연과학 전공자의 모임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문과 쪽 전공자들이 자연과학 쪽 지식을 결여하고 있듯,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분들은 대체로 인문학 쪽 관심이 희박하다. 같은 대학에 있지만 사실 딴 세계에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도 있다. 친구의 모임은 주로 인문학 서적을 읽고 있었다. 나 역시 교양 과학서에 손이 자주 가는 편이다. 어쨌든 그날 모임은 아주 즐거웠다.

달포 뒤 그 친구가 전화를 걸어 다산(茶山)을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그런 방법은 없노라고 답하자, 이것저것 다산에 대해 물었다. 신통한 답은 아니지만 아는 대로 조금 주워섬기자 이내 ‘다산평전(茶山評傳)’ 같은 책은 없느냐고 물었다. 지금 같으면 박석무 선생이 쓴 <다산 정약용 평전>을 소개했을 터인데, 그때는 이 책이 나오기 한참 전이다. 없다고 하자, 그래? 그런 책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아쉬워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어떤 인물에 대해 공부를 하고 싶은데 접근할 방향을 찾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가 남긴 저작이나 연구서를 읽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게 또 쉽지 않다. 원저작이 어렵고 또 연구서는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나의 경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연구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무조건 읽어야 하겠지만, 그런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필요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평전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평전을 읽는 것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다. 최근에 읽은 평전으로는 피터 싱어의 <헨리 스피라 평전,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가 있는데, 동물운동가 헨리 스피라의 생애를 통해 동물권에 대한 생생한 지식을 얻게 돼 엄청나게 고마웠다. 거슬러 올라가면 평전을 읽고 공부가 된 적이 적지 않다.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 막스 갈로의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평전> 3부작을 읽고 비로소 혁명의 시대를 희미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 <스탈린 평전>도 러시아 혁명과 전체주의 체제를 이해하는 데 아주 요긴하였다.

아나키즘에 대한 이해는, <바쿠닌 평전> <엠마 골드만 평전>으로, 인도 독립사는 <간디 평전>으로, 또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은 <암베드카르 평전>으로 읽었다. 문인, 예술가의 평전도 흥미롭기 짝이 없다. <파블로 네루다 평전> <자코메티 평전>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평전은 아마도 나의 뇌 속에 간직돼 있을 것이다. 읽다가 만 것도 있다. <케인즈 평전>은 읽다가 다른 책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끝을 내지 못했다. <헤겔 평전>은 너무 길고 난삽하여 3분의 1쯤 읽다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아우구스티누스, 윌리엄 모리스, 미켈란젤로 평전은 아직 서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 학계나 문필계에서는 아직 평전을 쓰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다. 근대 이후는 모르겠으되 조선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야말로 평전의 황무지다. 조선 건국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정도전 같은 경우도 TV 연속극은 있지만 믿고 읽을 만한 평전이 없다. 세종대왕은 어떤가? 왕이라서 평전이 필요 없다고? 그렇지 않다. 왕이야말로 권력에 가려 평가의 왜곡이 일어나기 쉬우므로 엄정한 평전이 필요한 것이다. 이순신은 어떤가? 이순신의 전기는 대부분 거의 영웅서사시에 가깝다. 당대 사회의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철저한 자료 비판을 통해 그의 내면까지 읽어내는 그런 평전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평전의 결핍은 상상외로 심각한 수준이다. 다산이라면 모두 대단한 학자인 줄 알지만, 최근에 박석무 선생의 <다산 정약용 평전> 외에는 믿고 읽을 수 있는 평전이 없다. 이 책으로 급한 대로 해갈(解渴)은 하게 되었지만 다산 같은 학문의 거인의 경우, 그의 학문 전체를 충실히 조망할 수 있는 ‘학자 다산’의 평전이 또 나왔으면 한다. 어디 다산뿐이겠는가? 박지원도, 박제가도, 이덕무도 모두 평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사실 인물과 그의 생애, 업적을 평가하는 글은 한문학의 전통에서는 결코 드물지 않다. 아니, 오히려 풍성하다. 사람이 죽고 나면 쓰는 행장과 비문, 전(傳) 등이 그렇다. 이 중에는 지금 평전의 양에 걸맞게 아주 긴 것도 있다. 주자의 <장위공행장(張魏公行狀)>이란 작품은 한문책으로 220페이지, 전겸익의 <손승종행장(孫承宗行狀)>은 224페이지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아마도 책 두 권은 너끈히 나올 것이다. 물론 이렇게 긴 행장은 드문 것이고 또 행장은 인물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위주로 쓰인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평가를 하던 중국과 조선의 오랜 전통은 까맣게 잊혀지고 말았다. 오늘날 평전이란 행장과 비문, 전의 복합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터인데, 볼만한 작품이 없다는 것은 정말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하기야 시간이 흐르면 읽을 만한 평전이 적지 않게 나올 것이다. 다만 간절히 바라노니, 제발 영웅서사시는 이제 그만 썼으면 한다.

나와 같은 과 교수로 있는 정출헌 교수는 평전과 연보에 관심이 많다. 정 교수는 점필재연구소 소장이기도 한데, 이 연구소에서 ‘연보와 평전’이란 제목으로 작은 잡지를 낸다(연구소에서는 <이완용 평전> 등 몇 종의 평전을 내기도 했다). 나 역시 거기에 몇 차례 원고를 싣기도 했는데, 이 잡지 평판이 아주 괜찮다. 광고 따위도 없고 모조리 읽을 만한 글로 채워졌으니 어찌 그렇지 않을 것인가!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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