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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대는 정보화 시대이다. 정보화는 각종 지식-일상생활과 소비재에 대한 여러 정보 그리고 보다 학문적인 세계에 속하였던 정보에 대한 접근이 쉬워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정보 확대에 있어서의 근래의 특징은 정보들의 즉각적인 상호 교환이 용이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생활과 지식분야에서만 아니라 사회생활과 정치에서도 큰 의미를 가질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정치의 핵심이 사회적 소통의 정책적 결정(結晶)에 있다고 보는 경우 정보 매체의 발달은 민주주의 발전을 의미한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것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인간사가 그러하듯이, 이러한 발달에도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일 네이버 문화재단이 지원하는 ‘열린 논단’에서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이재현 교수의 ‘디지털 세계와 사회: SNS와 소셜리티의 위기’라는 강연이 있었다. 이 교수의 강연은, 제목에 이미 시사되어 있는 대로, SNS로 대표되는 사회적 통신망의 발달이 사회적 소통의 영역 확대와 동시에 위기를 품고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경고하였다. 이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은 비단 SNS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매체가 주도하는 여론 사회에서 또는 더 나아가 대중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일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보다 넓은 테두리를 염두에 두면서 이 교수가 지적하는 문제점 몇 개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이재현 교수의 분석에서 중요 개념은 ‘소셜의 소프트웨어화’이다. 쉽게 풀어 말해 본다면, 이것은 사람의 본래적인 사회성이 그것을 가동하는 장치-이 경우에는 컴퓨터 사용에 필요한 소프트웨어-에 의하여 규정 또는 규제된다는 것이다. 컴퓨터를 사용할 때, 사용자는 컴퓨터에 내장되어 있는 이용 절차를 쫓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보다 두려운 것은 그것이 한정된 기계 장치를 넘어, 그것이 지배적인 관습이 되고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행동할 능력을 잃어버리게 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 규범에의 복종은 모든 사회화 과정의 일부이다. 그러나 위에 말한 바와 같은 ‘자발적’ 예속화는 SNS에서는 물론, 보다 일반적으로 매체의 지배 하에서 특히 심화되는 현상이다.)

(출처: 경향DB)


전자매체에 의하여 인간의 사회적 성격이 형성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물론 개인의 개인됨이 바뀌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SNS 이용자가 어떻게 본래의 자기로부터 다른 자기로 바뀌게 되는가는 쉽게 예시된다. 가령,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이용자는 ‘계량화’에 의하여 자기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친구 수, 팔로워 수, 댓글 수, 좋아요 수, 태그 수’ 등을 자기의 존재를 규정하는 지표로 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를 객체화하는 것이고 진정한 주체적 존재로서의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또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자 할 때에도, 일정한 항목과 양식에 맞는 것만을 메시지에 포함할 수 있다. 이번 강연에서 대상이 된 전자매체가 아니라도 매체에 전달되는 전기적(傳記的) 사실은 대체로 그렇게 제한되어 있다. 이것은 사실 이력서와 같은 것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출신 학교, 관직 등으로 사람에게 상표를 부치는 것도 그러한 객체화의 일부인데, 이러한 주체의 객체적 전환은 관직을 절대적으로 중시했던 한국 사회에 오래 지속되어 온 풍습이라 할 수 있다.

전자매체에서 보는 단순한 메시지 전달의 강박도 자기 객체화 또는 자기소외를 촉진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SNS 사용자는 자신이나 주변에 일어난 사실을 이야기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것은 앞의 신분 명세를 요구하는 것과는 전혀 반대의 요청인 것 같으면서도, 자아의 공허화라는 동일한 결과를 가져온다. 요청받는 것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큰 것만이 아니라 사소한 것까지 글로 전달하여 달라는 것이다. 작은 사건까지를 전하라는 것을 이재현 교수는 ‘미세 이벤트화’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실 자기 이야기를 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경우 이야기는 상투적인 공식을 빌리는 것이어서 사실의 진정한 내용이 상실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많은 자서전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자기가 만드는 것이나 밖에서 오는 것이나 파편적 정보의 누적은 인간을 파편화하는 효과를 갖는다. 자아는 언어화하는 데에서가 아니라 침묵의 반성에서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긴급한 소통의 요구는 침묵과 반성의 시간을 빼앗아 간다. (물론 진정한 주체로서의 자아 또는 진정한 자아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아는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찾아져야 하는 어떤 것으로 규정될 수는 있다.)

‘소셜의 소프트웨어화’는 물론 개인을 넘어 사회 구성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소프트웨어의 작동을 위하여 따라야 하는 지시와 명령은 보다 더 넓은 영역에서 강제성을 가진 지시가 될 수 있다. 페이스북과 같은 소통 매체에는 메시지 전달을 요구하는 지시가 뜬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하기 시작하면, 메시지를 띄우는 것은 저절로 심리적 강박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현 교수가 인용하는 보드리야르의 말로서, ‘강제된 교호성(사회성)’이 생겨나게 된다. 소통에 참가하는 것이 강제적 성격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강제성은, 이 교수의 설명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에 참가하라는 지시이다. 그런데 이 강제성에는 정치적 강박이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시민이나 국민으로서의 의무로서 표현될 수 있다. 어떤 정치적 입장은, 앞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사회 소통의 네트워크 참여를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는 실질적인 삶의 현실에 관계되는 것이든 아니든, 이념이나 당파 또는 다른 ‘관시’의 연줄로 타고 여러 가지 정보와 질문과 구호에 ‘응답’하라는 요구들도 쉽게 이러한 ‘강제된 사회성’의 내용이 된다.


그런데 전자 매체 또는 매체의 발달로 인하여 참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매체가 파악하는 사회가 반드시 사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전자 매체 그리고 매체는 사회의 멀고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지구의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보도한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는 이미지가 된다. 그러나 선택된 사건으로 구성된 세계, 보도와 이미지에 의하여 평평해진 시공간이 참으로 사실의 시공간과 세계에 일치하는 것일 수는 없다. 더구나 그것이 나에게 또 나의 공동체에 의미 있는 체험적 사실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보드리야르가 드는 예로서, 충실한 보도의 경우에도 지도가 실제의 땅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데에서 미루어 볼 수 있는 일이다. 보드리야르는 자본주의 외에도 여러 요인으로 가상의 세계가 탄생하게 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요인은 대중매체라고 한다. 대중매체에 보도되는 것은 ‘(행동의) 의지나 대의(代議)가 의미를 갖고 판단이 작용하는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며, 그러한 사건들과 이미지의 공간은 ‘전시대에 있어서 국민을 대변하기도 하고 연극 같기도 했던 정치 또는 공적 의견의 공간’과는 다른 것이다.’(영역 <보드리야르 문선>) 이것이 대중으로 하여금 많은 보도되는 사건들에 무감각하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이렇게 현대인은 가상의 세계에 산다. 그런데 가상을 벗어나서 현실로 돌아가는 방법은 없는가? 보드리야르는 이 회귀가 불가능하게 된 것이 오늘의 세계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과장된 이론화에서 나온 진단이라고 생각해볼 수는 있다. 이재현 교수가 인용하는 다른 저자들은 오늘의 사회성-가상현실이 되는 사회성은 ‘육체적 고통과 차별을 근간으로 하는 실재 세계로부터 벗어나 가상의 세계로 떠나라는 유혹’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이 인용이 시사하는 것은 이론에서 벗어나 고통스러운 인간의 문제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그것을 사회적 정치적 과제화가 되게 하는 데에는 고통 받는 본인을 넘어가는 이해-반드시 이념화는 아니라도 적어도 인간 조건에 대한 공감적 이해와 그에 대한 제도적 대책을 요구할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경고를 받아들인다면, 그 과정이 통념적인 개념화일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구성된 가상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된다. 고통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은 이념의 오만을 넘어 인간의 현실에 대한 경건한 존중으로 찾아가야 하는 새로운 길일 수밖에 없다.

※ 2011년 8월부터 연재해 온 김우창 칼럼을 마칩니다. 칼럼을 통해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을 보여준 김 교수께 사의를 표합니다.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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