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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대한 관심이 수그러들고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 상황이 아닌가 한다. 물론 관심의 쇠퇴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도 데모가 빈번하고 단식 투쟁이 벌어지고, 최근에는 비극 중에도 비극인 분신자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열렬한 구호들의 외침도 여전하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사회 전체를 움직이는 힘이 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정치적 관심의 쇠퇴는 바로 격렬한 행동과 언어를 휘두르는 정치의 움직임에 일부 원인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볼셰비키 혁명기에 레닌은 인민을 위하여 일어섰다는 혁명가가, 혁명이 인민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혁명 그 자체를 본업으로 삼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경고를 한 일이 있다. 이와 비슷하게 최장집 교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논하면서, 민주주의가 정치 운동에서 능률적인 민주적 절차로 자기 변신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데에서 오는 정치적 역기능을 지적한 일이 있다. 최 교수의 진단으로는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제대로 작동하는 정당 정치의 확립이 중요하다. 국민의 입장-물론 계층적으로 그리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는 국민의 입장을 바르게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정당이다.

물론 국민의 입장이라는 것도 자명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석명(釋明)되어야 하는 과제이다. 몇 해 전의 미국 대통령 선거 직전에 뉴욕타임스에 두 가지 흥미로운 여론조사 결과가 실렸다. 하나는 후보자 지지와 정책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급한 관심사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후자에 대한 답은, 돈 문제와 같은 것도 있었지만, 당장에 생각하고 있는 일들, 병 문제라든지, 물품을 구매하는 일이라든지, 어디를 급하게 가야 한다든지, 일상적인 작은 일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람의 일상생활은 대체로는 이러한 사소한 일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선거에 출마하는 정치인에게 그리고 선거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보다는 공적인 문제이다. 국방과 같은 일 이외에 오늘의 사회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하부구조들--수도, 전기, 하수, 도로, 교통, 통신 등의 시설들이 공적인 관심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세계화가 진전되고 있는 오늘날, 국제적인 비교도-가령, 평균수명, 공권력의 부패도, 여성 사회진출, 진학률, 공기청정도 등의 국제적인 비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러한 지표들이 경제나 국제관계에서의 국가 위상뿐만이 아니라 국민의 정권 평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천연자원이나 환경문제는 정치적 열정을 불러내지는 못하면서도 가장 큰 공적인 관심사가 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포함하면서도, 역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람의 살림살이 문제들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살림의 문제에서, 위에 말한 잔일들보다는 더 중요한 항목들로 이야기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큰 항목들이란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상황을 이루는 일들이다. 그것은 옛날 식으로 생각하면, 의식주, 또는 구휼(救恤), 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여러 문제들, 또는 환과고독(鰥寡孤獨)의 괴로움에 관계된 일들이다. 전통적인 정책의 많은 것은 고통의 문제에 관계된다. 인생행로 전부를 포괄하는 생로병사는 사고(四苦), 또는 인생팔고(人生八苦) 중의 반이기도 하다. 이에 비슷한 오늘의 삶의 문제들은 출산, 육아, 교육, 직업, 의료, 노년 복지 등의 정책이 될 것이다. 이것들은 고(苦)의 주제들을 조금 더 긍정적으로 바꾼 것이라 할 것인데, 한발 더 나아가 요즘에 이야기되는 행복이나 안녕도 여기에 추가될 수 있다.

 

일러스트 김상민

정치의 기능은 지금 시점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생고를 완화하고 행복을 증대시키는 데에 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수단은 경제이다. 국민의 관점에서 그것은 고용이고 또 복지이다. 복지제도는 최소의 행복으로부터 탈락한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을 보장하려는 제도이다. 이러한 모든 문제가 일관된 국가적 계획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의 실패는 이제 역사적 체험이 되었고 지금에 와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 되어 인생의 고락(苦樂) 문제도 적어도 당분간은 그 테두리 안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동력은 이익의 추구이다. 그것이 국부(國富)가 된다는 애덤 스미스의 이론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공동 과제의 수행을 개인 이익의 추구에 맡길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인다. 그러나 이익 추구의 체제 유지에도 공적 질서가 필요하고, 여기에 사회 전체의 생활 안정 문제가 포함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는 빈부차도 포함된다. 그것은 사회정의 문제를 떠나서도 안정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익 사회에서도 그 전체의 질서를 위해서는 적어도 사회활동의 여러 부분-갈등과 모순을 포함하는 부분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조정이 필요하다. 여러 집단들 사이에 이익의 차이뿐만 아니라 사회전체의 방향과 정책의 우선순위에 차이가 없을 수가 없고, 사람의 일로 자체 모순을 산출하지 않고 지속되는 일은 없다. 사실 어떠한 체제에서든 삶의 안정 또는 풍요를 위해서는 복합적 요인들의 상호 조정이 있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와 자발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조직은 그것의 결여로 하여 사회의 여러 문제를 놓치게 된다. 이것을 수용하는 경우, 사회 각 부분의 총화는 상호조정을 필요로 하는 복합 체계가 된다.

복잡하고 복합적인 체제를 분석하고 조정하는 데에는 전문적인 지식이 필수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체제에서의 정치는 정치가가 아니라 전문 지식을 쌓은 사람이 맡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 삶의 문제 해결에 가장 중요한 것이 경제가 된 마당에서는 경제에 밝은 사람이 정치를 떠맡아야 할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러 관점을 종합하여 최선의 균형을 찾을 수 있는 철학적 능력이 좋은 정치가의 자격 요건이라는 예로부터의 생각은, 조금 더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문가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정치지도자를 선발하는 전문 고시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없다. 정치에 정치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람의 일에 대한 바른 판단은 반드시 전문 지식이나 훈련에서 나오는 판단에 일치하지 않는다. 좋은 판단과 행동은 인간적 지혜, 현실에 대한 직관적 판단과 행동적 결단, 이러한 것들의 결합에서 나온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 행동은 그 나름의 독자적인 인간 행동의 영역을 구성한다.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말하는 것도 그것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하나로 뭉칠 때 생겨나는 신나는 느낌, 해방감과 힘도 정치가 독자적인 인간 행위의 공간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의 핵심이 국민의 살림살이에 있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소통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지만, 사회적 필요와의 소통이야말로 정치에 주어진 오늘의 과제이다. 정치가 사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에 기초하여 사회적 소통을 얻어내려면, 문제에 대한 합리적 이해 또는 과학적 분석이 선행하여야 한다. 거기에서 정책이 나오고 정당의 존립 이유가 생겨난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는 정당의 타협도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정책들이 있어야 가능하다. 구체적인 정책안의 주고받음이 없이 어떤 타협이 가능할 것인가. 그러나 복합적 이해와 그에서 나오는 정책 개발은 하나의 정치 행동으로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소신을 약화시키고 집단열정의 달아오름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역설은, 사회의 살림 문제가 중요해진 시점에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또는 해결을 지향하는 정책안들을 내놓지 못한다면, 정치가 사람들의 마음에서 멀어지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군사정부에서 민주 정부로의 이행은 거의 전적으로 행동주의적 정치를 요구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필요한 것은 정치가 사회의 살림살이에 구체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정치가 그 영향력을 회복하는 길은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방안으로 사회와 소통하는 것이다. (정치에 대하여 우리 사회에서 암암리에 받아들이는 전제는 권력과 벼슬과 이권의 분배 기구라는 것이지만, 이 생각은 이제 조금씩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회 문제에 정치적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정치열의 감소를 무릅쓰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의 인간적 위엄과 삶의 진정한 가능성에 대한 깊은 믿음으로 연결된다. 정치 지도자는 여기에 봉사하는 윤리적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되고, 정치 참여는 국민에게도 마땅히 수행해야 하는 의무가 된다. 그러면서 다른 방향에서 공공 행복의 활동이 증대될 수도 있다.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 경쟁은 타매의 대상이 되지만, 사회 공간에서의 진정한 수월성의 추구는 그러한 행복의 하나이다.

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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