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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은 내게 남자 어른의 과일이었다. 무거운 수박을 번쩍 들고 어딘가로 갈 수 있는 사람은 가족 중 아버지뿐이었으니까.

삼복에 접어들었다. 아직도 농촌에서는 초복이면 웃어른께 수박 한 통을 사서 전하며 인사를 올린다. 복날을 여름 명절처럼 챙기는 전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성하(盛夏)의 맛’이라고도 하는 이 수박이 요즘 위태롭다. 식구가 많았던 우리집에서 수박 한 통을 식구들이 골고루 먹는 방법은 화채를 만드는 것뿐이었다. 잘라 먹었다간 한 사람당 두어 쪽도 돌아가지 않는다. 사올 때 맛본다고 세모나게 잘라낸 부분을 얻어먹는 것이 막내인 나의 특권이었다. 화채에 넣는 사이다도 가욋돈이 드니 사지 않고, 숟가락으로 수박을 긁어 설탕을 뿌리고 얼음을 더한 수박화채로 주로 먹었다.

요즘은 반대다. 식구가 너무 없어서 수박 먹기가 부담스럽다. 한 통 사서 다 먹으려면 며칠간 열심히 먹어야 하고, 수박껍질을 버리는 데에도 돈이 든다. 대형마트에서는 수박 반통 판매 수준을 넘어 아예 8분의 1쪽 정도로 잘라 전용 용기에 담아 팔고 있다. 1인 가구의 증가와 생활양식이 변하면서 수박농가에서도 고민이 많다. 큰 수박(10㎏) 한 통을 5000원에 내놓아도 선뜻 들고 가지 않는 세상인 것이다. 그래서 크기가 작은 과일의 생산을 독려하고, 아예 한 손으로 쏙쏙 집어먹을 수 있는 대체작물을 찾으라고 한다. 근래 사과처럼 깎아 먹을 수 있는 작은 수박인 ‘애플수박’ 재배도 많이 늘어났다. 예전엔 크게 키우라 했는데 요즘은 작게 키우라 한다. 수박은 무거운 작물이어서 상차와 하역 작업에 엄청난 힘이 들어간다. 그러다보니 개별 농가 차원에서 감당하기 어려워 포전거래(밭떼기 거래) 형태가 많다. 그러면 업자들에게 고용된 이주노동자들이 수박을 나르고 싣는 작업을 한다.

2016년부터 농수산물시장에서 수박은 하차 거래가 의무화됐다. 예전에는 트럭에 싣고 온 그 상태에서 경매를 하는 상차 거래였다. 이제는 산지에서 처음부터 선별해 옥타곤박스라고 부르는 대형 박스에 넣어 보통 ‘빠레트’라고 부르는 ‘팰릿’에 얹어 경매에 부친다. 수박만이 아니라 점점 더 많은 농산물의 하차 거래가 의무화되고 있다.

문제는 박스 값이나 팰릿 값 같은 물류비 발생을 생산자들이 감당 못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물류보조비가 조금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소비부진과 수입 과일 증가로 경쟁이 가혹할 정도로 치열하다보니 수익률이 점점 악화되고 있다. 이런 마당에 물류의 현대화라는 것도 생산자들에게는 부담일 뿐이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이제 과일과 농수산물도 크기 경쟁을 하지 말고 당도와 맛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시대라고 한마디씩 보탠다.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수박의 경우 크기가 작으면 그만큼 손이 많이 간다. 열매를 솎는 적과 작업의 방식도 달라져야 하고 처음부터 모종 심는 것도 다르다. 시간과 손이 더 많이 필요하단 뜻이다.

농촌의 일손은 이제 철저히 임금노동 체계다. 특히 시설원예 작물은 이주노동자들이 다수다. 농가 입장에서는 사람 한 명을 더 고용하면 그만큼 수익률이 저하된다. 최저임금 인상 논의에서 농촌 현장도 차등 적용 대상으로 해달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크기가 중간 이하인 수박의 값을 더 쳐주겠다는 보장도 없으니 혼자서 나설 수도 없다. 수박의 속내가 복잡하다. 쪼개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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