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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눈]별 헤는 밤

opinionX 2017. 4. 13. 15:11

로켓이 지나가는 우주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선창 밖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별 하나하나가 추억처럼, 사랑처럼, 동경처럼, 시(詩)처럼 반짝입니다. 추억이 시처럼 반짝이는 계절이 가을 말고 또 있을까요? 그리고 나는 문득 쓸쓸함을 느끼고 어머니, 당신을 떠올립니다. 어머니. 저는 어린 시절부터 별들에게 하나하나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잠자리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별들은 낮에 놀았던 친구들처럼 밤하늘에서 반짝여 웃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커서 우주학교에 다니기 위해 밤늦도록 공부하다 문득 바라봤던 밤하늘의 별들도 친근하고 정답게 저를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것만 같았고, 그건 아버지가 탄 배가 소행성대에서 실종된 이후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던, 우리가 아직 지구에 살고 정기 항로는 달과 지구 사이에만 있던 시절에는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첫날은 컵을 그냥 허공에 내려놓거나 계단에서 뛰어내리는 실수를 하셨지만 이내 웃으며 그네를 고치고 낙엽을 쓸고 어머니와 외출하셨지요. 저는 그때 아버지가 주셨던 달의 먼지가 든 작은 유리병을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어머니, 저는 현창 밖의 별 하나하나에 다시 아름다운 이름 한 마디씩을 붙여봅니다. 우주학교에서 같이 훈련받은 동기들의 이름과 기, 필, 삼, 묘 이런 별자리 이름들과 벌써 우주로 영원히 떠난 선배들의 이름과, 태양계에 남은 사람들의 이름들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앞으로는 결코 볼 수 없을 지구의 작고 아름답고 가녀린 동물들의 이름을, 그리고 브래드버리, 스타니스와프, 젤라즈니 같은 시적인 운율이 있는 이름들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그리고 지구가 아스라이 멀듯이. 로켓은 이제 태양권계면을 지나고 있고, 저는 당직을 교대하면 동면실로 가야 합니다.

궤도 엘리베이터와 우주항이 건설되고, 화성 식민지가 개척되고, 인류의 발걸음이 토성의 고리 바깥까지 뻗어 나가자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시는 횟수는 점점 줄고 간격이 늘었습니다.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이후로는 중학교 때 한 번, 고등학교 때 한 번만 우주항에서 잠깐 뵈었던 듯합니다. 오랜 우주 생활로 무중력실에서나 간신히 만나 뵐 수 있었던 아버지는 수척하고 피곤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눈만은 별처럼 빛나고 있었지요. 그래요. 아마 아버지의 눈 속의 그 별들이 저를 여기까지 이끌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가 바라보기만 했던 저 심우주의 별들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외부 태양계 탐사는 시기상조이며 자원 낭비라고 합니다. 태양계 안에도 아직 개척하고 개발해야 할 곳이 많다고….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 항해는 섣부른 치기와 이기적인 공명심에서 비롯된 잘못된 선택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과 이뤄온 업적들 중에서 그렇지 않은 것이 과연 얼마나 될는지요? 어머니,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서 마지막으로 지구에 내려갔던 날 밤, 고향 땅에서 그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뼈를 고향 땅에 묻을 수 없다면 무엇을 대신 묻을 수 있을까요?

항성 간 여행은, 태양계 내 외행성 개척 초창기들이 그랬듯이, 돌아갈 수 없는 편도 항해입니다. 아버지는 그래도 꼬박꼬박 영상 편지를 보내주셨었죠. 하지만 제가 센타우루스 자리 알파성에 도착해서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는 빛의 속도로도 다시 4년 뒤에나 도착할 것입니다. 어머니, 제가 과연 어머니 얼굴을 다시 보고, 어머니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요?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아니, 어머니, 우리의 첫 항해가 실패로 끝난다고 해도 저는 결코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도 우리의 이름을 다시 불러주지 않는다고 해도 나의 이름은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이 배가 영원한 밤의 별들의 어둠에 집어 삼켜진다 해도…. 그리고 어머니, 그러나, 겨울밤이 지나고 나의 새로운 별에 봄의 아침이 온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당신 딸의 이름자 묻힌 지구의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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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광속 추진과 공간 도약이 횡행하는 스페이스오페라들에서는 은하계를 가로지르는 것이 손쉽게 그려지지만 실제 별과 별 사이의 거리는 막막하기 그지없어서, 화학 연료 로켓을 대체할 새로운 기술들이 상용화된다고 하더라도 외행성들과 지구 사이의 항해는 마치 예전 대항해 시대 당시 대륙 간 항해와 비슷할 것입니다. 하물며 항성 간 항해는…. 빛의 속도로도 가장 가까운 별까지 4년이 넘게 걸리는 거리는 아무리 미래의 기술이라도 쉽게 극복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현실적인 무게감을 원하는 SF들이 배경을 태양계 내부로 한정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국내에 소개된 가장 근래의 작품일 제임스 S A 코리의 <익스펜스> 시리즈는 지구와 화성, 소행성대의 정치적 알력과 외계로부터의 위협을 다루고 있으며, 얼마 전 재출간된 아서 C 클라크의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는 토성과 목성을 배경으로도 매력적이고 풍부한 지적 모험담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입증한 바 있습니다.

앞으로의 우주 탐사와 개발은 아마 많은 SF들이 이미 예견한 것처럼 달과 소행성들의 자원 채굴을 중심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달이나 화성, 혹은 그 너머의 행성과 위성들에 영구적인 식민지가 개척될까요? 지구 자원이 모두 고갈되고 환경이 돌이킬 수 없이 오염되지 않는 한, 인류가 이 포근한 요람을 떠나 탈지구하는 날은 쉽게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지금 여기가 아닌 언젠가 어딘가를 꿈꾸는 사람들은 항상 있었고…. 인류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언제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멸종을 앞두고 있는 한국인들 중에서도 과감하게 우주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박성환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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