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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도 칩 이식받고 싶어.”

“글쎄 위험하다니까! 잘못되어서 뇌출혈 일으킨 사람 뉴스 못 봤니?”

“우리 반에서 안 한 사람 이제 나밖에 없어. 애들 다 칩 심어서 지들끼리 톡하고 게임하고 논단 말야!”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었다. 아이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며 속상함과 죄책감, 미안한 감정 등등이 한꺼번에 치밀어 오르는 것을 속절없이 누를 수밖에.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마음이 쓰였다. 유전자 맞춤 아기가 대세가 되었지만 비용이 부담스러웠다. 엄마나 아빠에게 특별히 취약한 유전자는 없었기에 괜찮으려니 하고 그냥 낳았는데, 자라면서 계속 문제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지역건강보험에 가입할 때부터 유전자 맞춤 아이가 아니라고 하면 납입 보험료가 높게 책정되었다. 꼼꼼한 건강진단서를 첨부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유치원에 들어갈 때는 각서를 썼다. 건강검진 결과 일단 이상은 없어 보이지만, 만약 예기치 않은 유전성 질환 발생 시에 그로 인해 유치원에 끼칠 어떠한 무형적 손해도 보상하겠다고 서약해야만 했다. 유치원의 명성에 흠이 잡힐까 우려하는 속셈이어서 민사 소송으로 엄청난 배상금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아이가 졸업할 때까지 내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교육 정책 덕분에 노골적인 차별을 받지는 않았지만 은근한 따돌림은 더 심했다. 첫 학기가 시작되고 두어 달 정도가 지나면 유전자 맞춤 시술을 안 받고 태어난 아이들끼리 방어적 동아리를 형성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유전성 질환에 취약한 유전자만 제거하는 일 외에 다른 유전자 조작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지만, 시술을 받고 태어난 아이들의 지능이나 신체발달 지표는 유의미하게 평균을 상회했고 그런 추세는 계속되었다. 부유층이나 권력층 아이들이 ‘플러스 알파’의 시술까지 받는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컴퓨터 인터페이스(HCI)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뉴스가 났다. 사람의 두뇌에 스마트칩을 이식해 넣으면 머릿속에서 메시지를 주고받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동영상이나 문서 파일을 열어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아 시제품이 선보이더니 곧 상용화되었다. 짧은 메시지만 주고받을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수준이었는데도 반응은 엄청났다. 주로 10대 아이들을 대상으로 열광적인 유행이 일었다. 간혹 부작용이 보고되었지만 대다수의 호평에 곧 묻혔다. 

무엇보다도 학습 효율의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부모들이 다투어 자녀들에게 칩 시술을 권할 정도였다. 아이들은 스스로 앱을 개발해서 간단한 기능을 가지고도 게임을 만들어 놀 정도로 신기술에 광속도로 적응해가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인간의 두뇌에 직접 시술하는 기기가 이렇게 신속하게 제품으로 출시되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오랜 시간 검증 과정을 거쳤어야 마땅하지만 의약품이 아니라는 이유로 생략되었다. 인류의 미래를 혁명적으로 뒤바꿔 놓을 세기적 발명이라는 대대적인 홍보가 업계와 학계에서 쏟아졌으나 따지고 보면 미처 대비하지 못한 법률의 미비점을 파고든 약삭빠른 상술일 뿐이었다. 

게다가 젊고 어린 세대일수록 새로운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들은 늘 변화, 발전하는 과학기술을 마치 호흡하는 공기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여겼다.

아이의 학급은 열다섯 명이다. 칩 시술을 받지 않은 아이는 둘밖에 남지 않았는데, 지난주에 나머지 한 아이가 마침내 칩을 심었다고 한다. 

당연히 칩 시술을 해주어야 하지만, 돈이 없다. 소득 최하위계층으로 근근이 살면서도 아이가 별 구김살 없이 자라주어 고마웠는데, 이번처럼 풀이 죽은 모습은 처음이다. 한두 해만 더 버텨 보면 혹시 보험 처리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다음달 선거 때 후보자들 공약을 좀 꼼꼼히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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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적 과학기술은 세기적 윤리 문제와 쌍둥이로 태어난다. 

이 자명한 사실을 20세기의 인류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1945년에 핵폭탄이 실전에 사용되기 전까지 인류는 과학만능주의와 과학이 가져다 줄 장밋빛 유토피아 전망에만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과학기술에 대해 의심과 불안을 갖고 과학윤리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빠르면 21세기 중반에 인공지능(AI)과 인간 두뇌가 결합하는 특이점이 오고 호모 사피엔스는 새로운 진화의 단계에 접어들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유전공학이 인류의 건강과 복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면에 필연적으로 드리워질 그늘에 대해서는 미리 대비하지 않아도 될까?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과학기술은 그 자체보다 사회적 수용 과정에서 간접적, 부차적으로 폐해가 나타나는 일이 적지 않다.

신기술이 사회의 구조적 취약성과 결합되면 새로운 계층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에 대비하는 사회적, 정치적 연구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인류는 아마도 21세기의 대부분을 새로운 과학기술에 대한 입장 정리를 하느라 소모하게 될 테지만, 미리 대비하면 그 비용은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늦춰서는 안된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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