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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다 처음이신가요?” 둘이 고개를 끄덕이자 S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겠지만 한 번 더 확인 드릴게요. 기본적으로는 두 분의 DNA를 예전처럼 그대로 조합합니다. 그리고 전체 스캔을 해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유전적 결함을 찾아 수정하고, 그다음에 두 분이 선택한 옵션들을 넣고 다시 시뮬레이션을 돌려 확인 조정하고, 실제 수정란에서 마지막으로 오류를 바로잡은 다음 착상시키게 되죠. 오늘은 첫 단계로 옵션을 고르실 차례예요. 여기에 두 분이 원하시는 자녀상을 자유롭게 작성해주세요.” 줄 없는 노트를 내밀자 둘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 뭔가 선택지 같은 건 없나요?” S는 웃었다. “옛날 우스개에서 나온 말이 사회적 고정 관념이 되어 버린 거예요. 주사위 굴려서 체력이나 지력 포인트 올리는 거 말씀하시는 거죠?”

둘이 쑥스러운 듯 따라 웃으며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유전자 조작은 그렇게 딱딱 꿰맞추는 게 아녜요. 애초에 모두 유전자로만 결정되는 것도 아닌 데다가, 원하는 요소만 정확히 발현되도록 조합하는 것도 불가능하죠. 다만 안정성이 입증된 유전자 배열 패턴이 몇 가지씩 있고, 예비 부모님들이 바라는 자녀상을 말씀해주시면 최대한 거기에 맞게 패턴들을 조합해 볼 수 있는 것뿐이에요. 외모나 체질 외에 성격 등도 가능하지만, 저희가 항상 강조하는 건 사람은 유전자로만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아무리 바라는 특질을 유전자로 조합한 아이라도 부모님들이 제대로 가르치고 키워주지 않으시면 효과가 적죠. 미리 생각해오신 게 없으시면 가져가셔서 충분히 의논하신 다음에 다시 오셔도 돼요. 혹시 더 궁금하신 거나 필요하신 게 있나요?”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두 사람은 마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라도 언제든지 전화 주시면 돼요.” 둘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노트를 챙겨들고 일어섰다.

둘이 다시 온 것은 보름이 지난 뒤였다. “계속 더 생각하다가는 늙어 죽겠더라고요.” 내민 노트는 많이 얇아져 있었고 펼쳐보니 남은 페이지들도 여기저기 고쳐 쓴 자국이 보였다. S는 몇 페이지 더 넘겨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희가 검토하면서 혹시 여쭤볼 부분이 있으면 연락드릴게요. 오늘은 DNA 샘플을 채취하고 귀가하시면 되겠어요. 참, 회임하실 분은 어느 쪽이시죠?” 둘 중 하나가 손을 든다. 간호사가 둘을 데리고 검진실로 나가자 S는 노트를 다시 펼쳐보았다.

성격: 자립심이 강한 사람 / 배우기를 좋아하는 생각이 열린 사람 / 책 읽기를 좋아 하는 사람 / 서두르지 않는 사람 / 욕심 많지 않은 사람 / 합리적인 사람 / 회의주의자 /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 / ….

외모: 키는 중간보다 조금 크게 / 얼굴이나 체형, 피부빛은 상관없음 가능하면 살찌지 않는 체질 / ….

건강: 면역력 강화 / 알코올 분해 효소 강화 / ….

S는 두 사람이 원하는 아이를 쉽게 머리에 떠올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위한 유전자형의 대략적인 조합도. 아이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쓴 점이 마음에 들었다. 좋은 부모가 될 거야. 하긴, IeNkTmJc2형이 대개들 그렇지 뭐. S는 둘 중 하나는 분명 IeNkTmJc2형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둘 다. 소문자 형질 패턴은 틀림없이 둘 다 e, k일 거야. e-k-m이나 e-c-m, e-k-n들은 서로에게 끌린다. 그리고 이 클리닉을 찾아오지. S는 업계의 오랜 괴담을 떠올렸다. 수정란 유전자 편집 기술을 최초로 상용화한 6개의 클리닉에서는 모두 저마다 편집된 유전자들에 자신들의 클리닉을 찾아오도록 하는 회귀 본능 백도어를 설치했었다고….

S는 고개를 저었다. 헛소리들일 뿐이야. 하지만 S도 클리닉에서 쓰는 오리지널 소스 유전자 지도를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다. 모두 헛소리들일 뿐이야. 그렇지만 가끔은 이 모든 게 모든 패를 열어놓고 하는 솔리테어 게임처럼 부질없고 덧없게, 사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은 유전자 이상의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아니, 하지만 유전자 조합이 인간의 전부라 하더라도, 인간은 결국 그걸 뛰어넘을 거야. S는 정부의 규제에서 벗어나 예비 부모들에게 무한정의 자유를 주고 원하는 대로 아이를 골라보라고 하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원하시는 아이를 장바구니에 담으세요. 날개 달린 아이? 다리가 여덟 개인 아이? 진공에서도 너끈한 외골격을 가진 아이? 돌고래처럼 잠수할 수 있는 아이? 두뇌 속의 와이파이 바이오칩으로 네트워크에 상시 접속이 가능한 아이? 영원히 사는 아이?

그것을 과연 인류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을 과연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거미 유전자와 접합된 아이들이 마천루들 사이로 거미줄을 치고 나방 유전자와 접합되어 넓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는 아이들을 노리는, 여섯 개의 손 다리를 가진 아이들이 지구 궤도 바깥의 무중력 환경 속에서 활개 치는, 인류가 인류의 테두리를 넘어서, 유전자의 한계를 넘어서서 자신의 가능성을 모두 발현시키는 날이 언젠가는 과연 올까? 인류의 유전자에는 지금까지 결코 켜지지 못했던 분자 스위치들이 얼마나 될까? 과연 언젠가 우리는 그 스위치들을 모두 켜보게 될까? 그때에도 인류는 여전히 인류일 수 있을까?

굳이 그래야만 할 건 또 뭐람? S는 어깨를 펴고 다음 손님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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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개조는 유전자 편집으로부터 비롯될 것입니다. 스스로의 DNA를 편집하는 인간이란 자체 프로그래밍 기능을 가진 컴퓨터, 혹은 자기 설계 기능을 가진 로봇처럼 불안감을 자극합니다. 종교가 없더라도 원초적인 금기를 어기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위험한 기술이 과연 개발되어야 할까요?       

하지만 종교와 윤리와 법률이 지식의 발전과 기술의 개발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 적이 과연 있기는 했는지 되돌아보면, 기술 개발을 금지하는 것보다는 사회에 바람직한 방향으로 자리 잡도록 잘 이끌어나갈 방법을 찾는 게 더 현명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성환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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