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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만의 할아버지는 올해 일흔여덟인데, 이 분의 특기는 ‘사기를 당하는 것’이었고, 취미는 ‘사기꾼과 사귀는 것’이었다. 이건 진만이 한 말은 아니고, 진만의 아버지가 술만 취하면 내뱉는 혼잣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스무 살 이후 매번 그 사기의 뒷감당을 해야만 했다.

진만이 목격한 일도 몇 번 있었다. 첫 번째는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일어났는데, 당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휴거’ 소동에, 그 열혈 신도 중 한 명으로, 그의 할아버지가 깊숙이 빠져든 것이었다. 당시 진만의 아버지는 막 이혼하고 전국 아파트 공사현장을 떠돌고 있었는데, 그래서 진만은 안양 다세대 주택 이층에서 그의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 속 할아버지는 매일 저녁 상가 건물 꼭대기 층에 자리 잡은 작은 예배당에 찾아가 무릎을 꿇고 거의 혼절하기 직전까지 ‘주님’을 외치는 사람이었다. 주님을 외치는 것도 좋고 천국이 가까워진 것도 좋은데, 그의 할아버지는 하필 꼭 손자인 진만을 데리고 예배당에 찾아가곤 했다. 친구들은 모두 받아쓰기 시험공부에 몰두하고 있을 때, 진만은 ‘이제 곧 심판의 불벼락이 내릴 것이다’ ‘세상 권세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같은 무시무시한 말들만 멀뚱멀뚱 듣고 있어야 했다. 후에, 진만은 할아버지에게 왜 그때 나도 거기에 데리고 갔냐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우리 손자랑 같이 천국 가려고 그랬지. 이산가족 될까 봐….

그 해, 휴거는 오지 않았고, 남은 것은 반년 넘게 진만의 아버지가 보내온 월세를 몽땅 헌금으로 바쳤다는 사실, 진만의 받아쓰기 시험점수가 늘 20점, 10점, 30점 근처에서 무너져내려 선생님의 심판의 불벼락(틀린 개수만큼 열 번씩 써오기)을 받았다는 사실, 그것이 전부였다. 진만은 중·고등학교 시절 공부에 흥미를 잃고 수업시간마다 ‘멍 때리기’를 반복했는데, 그게 다 자신의 기초학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때 휴거가 왔으면 어땠을까, 천국에 가도 영어를 해야 했을까, 쓸데없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물품 판매 사기단에 빠져 가시오가피즙을 삼백만원 넘게 구입한 적도 있었다. 그건 진만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었는데, 폐업한 예식장 건물에 새로 무슨 문화홍보업체가 들어왔다고, 할아버지가 매일 출근하다시피 그곳에 나갔다. 거기 가면 노래도 부르고, 마술도 보고, 간식도 주고, 휴지도 주고, 할머니들도 많다고, 할아버지는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듯 진만에게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가 새장가를 가려고 하시나, 생각하고 말았는데, 집에 들어온 건 새 할머니 대신 물품 구입 할부 청구서였다. 나중에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된 진만의 아버지 말에 따르면, 거기 나오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중 가장 통 크게 물품을 구입한 게 바로 진만의 할아버지라고 했다. 그때도 할아버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래도 36개월 할부하라는 걸 우겨서 48개월로 한 거야….

-네. 그래서 48개월 이자가 붙었구요.

할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그 이후에도 자잘한 사기를 당하긴 했지만, 진만이 대학을 가고 입대와 제대를 하는 사이, 차츰차츰 그 횟수는 줄어들었다. 진만의 아버지가 건설현장에서 은퇴해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면서부터 감시와 통제가 더 심해진 탓도 있었지만, 이젠 더 이상 사기꾼들도 접근하지 않을 정도로 할아버지는 늙어버린 것이었다. 어쩌다 한 번 안양집에 들르면 아파트 경비 일을 하는 아버지와 하루 종일 TV만 바라보고 있는 할아버지가 함께 저녁을 먹는 쓸쓸한 모습을 목격하곤 했다. 아무도 할아버지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지난달부터 진만의 아버지가 계속 전화를 해서 안양에 한 번 다녀가면 안 되겠냐고, 재촉 아닌 재촉을 해왔다. 다름 아닌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네 할아버지가 자꾸 대한문에 나가신다.

말인즉슨 작년 겨울부터 할아버지가 태극기를 들고 대한문 앞과 헌법재판소 앞, 집에서 거의 두 시간도 넘게 걸리는 삼성동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나간다는 것이다. 한겨울 찬바람 때문에 몸살이 들고 오한이 왔는데도, 마치 무슨 고행을 하는 신도처럼 자기 몸 챙기지 않고 새벽부터 지하철을 탄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너라면 끔찍하게 여기시잖냐? 너, 그거 아냐? 네 할아버지 요새 카톡도 한다. 집에 돌아오면 매일 그것만 붙들고 계셔.

진만은 한 번 올라가겠다고 말만 했을 뿐, 매번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전화라도 한 번 할까, 했지만 그저 생각뿐이었다.

먼저 전화를 걸어온 것은 그의 할아버지였다. 투표일 아침이었다.

-진만아 너 투표 잘해야 한다. 젊은 객기로 아무나 찍으면 안 되는 거야.

진만은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잠자코 할아버지의 말을 듣기만 했다. 어린 시절, 그를 등에 업고 예배당에 다니던 할아버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벌써 투표하신 거예요?

-그럼, 우리 동네에서 내가 두 번째로 일찍 했다. 내가 이번에 억울하게 쫓겨난 우리 대통령님을 구할 심정으로 눈 딱 감고 될 사람 밀어주기로 했다.

진만은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진만은 그 사람을 찍을 마음이 없었다.

-내가 기표소에 들어가자마자 이름도 보지 않고 댓바람에 1번 찍고 나왔다.

-1번요…?

-그럼! 우린 무조건 1번이지. 우린 배신하지 않아.

할아버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만은 잠깐 기호 1번 후보의 이름을 생각했다. 진만은 조만간 안양에 한 번 들를 결심을 했다. 할아버지는 지금 외로운 거다. 말을 붙여주는 사람이 없는 거다. 진만은 말없이 할아버지의 말만 듣고 서 있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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