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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립연구회의(National Research Council)는 1979년부터 과학기술계 여성 인력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이 보고서들은 박사 학위자들에 대한 상세한 통계조사를 바탕으로 국가의 관점에서 여성 ‘인력’의 활용을 고민한다.

인력 관리의 측면에서 여성 과학기술인 문제는 숫자의 문제로 귀결된다. ‘과학기술계에 여성은 왜 이렇게 적은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과학과 공학, 수학 분야로 진입해 석·박사 학위를 받는가, 이들 중 대학이나 공공연구소, 기업연구소 등에서 ‘연구인력’으로 남는 이들은 얼마나 되는가, 그리고 어떤 이유로 얼마나 많은 여성이 과학기술계에서 이탈하는가 등 숫자에 주목한다.

한국에서도 여성 과학기술인에 대한 조사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2006년부터 과학기술 부처의 주도로 매년 수행되는 ‘여성 과학기술 인력 활용 실태조사’가 대표적이다. 이 조사는 인력의 유입과 유출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미국 국립연구회의와 마찬가지로 인력 관리의 문제로 여성 과학기술인을 바라보고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흥미로운 점은 40년 전 미국의 조사 결과와 2016년 한국의 조사 결과가 거의 같은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과학보다는 공학에서 여성의 부족, 직급이 높아질수록 현저히 낮아지는 여성 비율, 임금 격차가 그것들이다.

가장 최근 통계를 살펴보자. 2016년 한국 대학의 자연계열 입학생 중 여학생은 50% 이상을 유지해 온 반면, 공학계열 여성 입학생은 채 20%가 되지 않는다. 조사 대상인 이공계대학, 공공연구기관, 민간기업 연구기관을 통틀어 여성 정규직 연구·개발 인력은 채 전체의 15%가 되지 않으며, 그마저 그중 약 60%만이 정규직으로 재직 중이다. 남성 연구인력의 81.2%가 정규직으로 재직 중인 것과 비교해 볼 때 여성 연구인력의 고용이 아주 불안한데, 이 격차는 특히 대학과 공공연구기관에서 두드러진다. 또한 직급이 높아질수록 여성의 비율은 현저히 떨어져, 이공대학 전임교수의 15.2%,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의 책임급 연구원의 6.8%와 6.7%만이 여성이다. 마지막으로 연구과제의 예산 규모가 커질수록 연구책임자 중 여성의 비율은 점점 낮아진다. 이 결과를 요약 정리한 보고서에서는 지난 10년간 변화 추이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보고서를 가득 채운 숫자들은 여전히 무겁게 다가온다.

여성 과학기술인을 국가가 활용 가능한 ‘인력’으로 바라보는 접근 방식은 여성 과학기술인의 삶을 다소 평면적으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대표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여성 과학기술인의 생애를 최종적으로 대학의 정년 교수 혹은 회사의 고위 관리자가 되는 일련의 과정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여성 과학기술인 인력 문제를 설명하는 잘 알려진 모델은 ‘새는 파이프라인’ 모델이다. 이공계를 전공하고,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로 채용되고, 정년 교수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며 파이프라인에 잘 남아있는 ‘성공적인’ 인력과 ‘누수’ 되는 인력을 추적한다. 미국 국립연구회의의 1983년 보고서 ‘사다리를 오르다(Climbing the Ladder)’ 역시 제목에서 비슷한 시각을 잘 반영한다. 파이프에서 새어 나오거나 사다리에서 떨어진 인력은 일종의 실패로 여겨진다.

또 통계는 한 개인이 여성이자 과학기술인이라는 서로 다른 정체성들 사이에서 갈등하고 타협하는 다양한 양상들을 보여줄 수 없다.

많은 여성 과학기술인들에게 ‘여성성’은 드러내지 않아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여성’ 과학기술인이 아니라 ‘과학기술인’으로 봐 달라는 요청이 이러한 입장을 대변한다. 대전세종연구원의 주혜진 책임연구위원은 대덕연구개발특구의 석사 및 박사급 여성 연구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여성성을 전략적으로 배제함으로써 과학기술인으로서 정체성을 추구하는 전략을 써왔다고 주장했다. 즉 “‘여성’을 버림으로써 여성과학기술인들은 보다 더 ‘과학기술인’다운 성공에 몰입할 수 있었다.”

반면, 학생들에게 과학과 공학이 여성에게 매력적인 분야임을 설득할 때는 전통적인 ‘여성성’을 소환하는 전략이 종종 사용된다. 여성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성향이 과학기술자로서 강점이 될 수 있음을 호소하거나, 어떤 분야를 ‘여성적’인 분야로 규정하며 여성에게 적합한 분야로 홍보하기도 한다. 이때 ‘여성성’은 균형감각, 섬세함, 공감, 배려, 소통, 감수성과 같은 특징들과 결부된다. ‘여성성’을 자신의 정체성에서 지워가며 꽤 성공적인 위치에 자리 잡은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이런 홍보 전략을 종종 사용하는 위치에 놓인다는 점은 서로 다른 두 정체성이 어우러지는 방식이 단순하지만은 않으며, 심지어 모순적이기까지 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자 김지영들’을 이야기하는 일이다. 미니스커트를 좋아하고 물리학을 사랑하는 김지영, 실험이 끝나면 축구 연습을 하는 김지영, 학교나 연구소가 아니라 공장의 엔지니어로 일하는 김지영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역시 여자는 수학에 약하다”는 엄마의 말에 생물학으로 진로를 정한 김지영을, 임신한 몸으로 유독한 화학물질로 실험을 한 김지영을, 남성 동료들 사이에서 성차별을 받았던 김지영을 더 많이 이야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수많은 과학자 김지영들의 이야기는 숫자가 보여주지 못하는 여성 과학기술인의 모습들을 펼쳐 보일 것이다.

문학평론가 신샛별은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소수 특권층 여성에 대한 사회적 주목을 지켜보며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는 다른 여성들에게 이제는 이목을 집중해 볼 때라는 동시대적 요청”이 출간 2년 만에 100만부 판매라는 기록을 달성할 정도로 열띤 호응을 불러일으켰다고 평가했다. 1980년대 태어난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띤 소설 속 ‘김지영’에 세상을 살고 있는 수많은 ‘김지영들’의 이야기가 투영되고 확장된 것이다. 과학기술계에도 이 “동시대적 요청”은 유효하다. 숫자가 보여주는 전형이 아닌, ‘과학자 김지영들’의 이야기가 필요한 까닭이다.

<강연실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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