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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느 날 불현듯 어떤 책을 꺼내들기 전까지. 책갈피 사이에서 봉투 하나가 툭 떨어지기 전까지. 봉투 안에는 언제든 사용할 수 있다는 2인 식사권과 엽서 네 장, 책표지를 인쇄한 책갈피 하나가 들어 있었다. 뒤늦게 떠올랐다. 언젠가 자신이 처음으로 펀딩이라는 데 참여했었다는 것을. 한 소설가가 돈키호테를 찾아 나선 여행에서 요리를 배우고 결국 식당을 차리기로 했다는 사연을 듣고, 그 사연에 요상하게 마음이 움직여 저도 모르게 참여버튼을 눌렀던 적이 있었음을. 그러곤 잊었다. 잊고 있었으므로 확인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참여했던 펀딩이 성공을 했는지, 식당이 열기는 열었는지, 어떤 음식이 나오고 있는지, 그 식당은 여전히 잘되고 있는지. 그러다 책갈피 사이에서 팔랑팔랑 떨어진 식사권을 보았고, 혹시나 싶어 전화를 걸었다. 저에게 2인 식사권이 있는데 예약이 될까요?

나도 잊고 있었다. 식당을 열기 전 펀딩이라는 걸 했다는 사실을. 펀딩에 참여했던 사람들 대부분 식당이 개업하기를 기다려 곧바로 찾아와 가게를 둘러보고 음식 맛을 보았으므로, 폐업을 앞둔 시점에 받은 그 예약전화는, 기일이 지난 약속어음을 들고 나타난 빚쟁이를 마주한 듯 난데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게다가 그가 원한 예약일은 하필 마지막 영업일. 이것은 계시인가 운명인가. 그 종이가 며칠만 늦게 발견되었다면, 전화 걸기를 조금만 지체했더라면, 마침 남는 여유시간이 그날이 아니라 그 다음날이었다면, 그 종이는 부도난 어음조각, 허망한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예약되고말고요, 주인은 아직 안 바뀌었습니다, 어서오세요.

4인 가족이었다. 한 아이의 손을 잡고 또 한 아이는 품에 안은 가족. 2인 식사권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주문을 해야 하는지 물었고, 그냥 적당히 알아서 드리마 대답하자,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채 모자라면 나중에 더 시키겠다 했다. 그들을 위해 어떤 요리를 냈는지 세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 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음식을 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식탁을 차리지 않아도 될 터이니. 어차피 소진해야 할 재료 인심이나 쓰자 하는 마음으로. 솔직한 마음으로, 매상이 오르는 것도 아니니 적당히 최선을 다하자 싶었을지도 모른다.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그들은 묵묵히 식사에 임했다. 맛있다거나 없다거나, 양이 많다거나 적다거나, 이만하면 됐다거나 더 달라거나. 쓰다 달다 좋다 싫다 반응이 없으니 조금 불안했다. 정말이지 그토록 가늠이 되지 않는 손님은 지금껏 없었다. 아이들조차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해찰을 부릴 만한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이할 정도로 조용히 앉아 천천히 어른스럽게 먹었다. 식당문을 열고 처음 맞은 손님처럼 좌불안석이었다. 낼 수 있는 음식을 다 낸 뒤, 후식으로 달콤한 디저트 와인과 누군가 사다준 케이크까지 나눠준 뒤, 이제 2인 식사권 메뉴가 다 끝났다 알렸다. 고개만 끄덕일 뿐 별 반응이 없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도 그들은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카운터에 서서 사연을 들었다. 아이들 키우느라 몇 년간 외출을 못했다는 아내의 사연. 펀딩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뒤늦게 발견하고 오기까지의 과정을 들려주는 남편의 사연. 큰애가 친구들에게 스페인 음식 먹으러 간다고 자랑하고 왔다는 고백. 이제야 아이들과 함께 외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앞으로 자주 오겠다는 다짐. 아이들도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맛있게 잘 먹었다고, 그중 조개껍데기에 들었던 우유맛 나는 부드러운 그것이 제일 맛있었다고, 배꼽인사를 했다. 너 그 말 안 했으면 나 두고두고 미워했을 거야, 라고 응답하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이제 더 이상 이런 식탁은 차릴 수 없겠구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차리는 식탁. 겨우 음식을 차린 대가로 들을 수 있었던 거대한 감사인사. 그와 더불어 듣게 되었던 수많은 사연들. 오늘 내가 소진한 것은 냉장고에 든 음식재료들이 아니었구나. 어떤 기회, 어떤 위안, 어떤 고마움, 어떤 감동. 내가 닫는 것은 그저 식당 문이 아니었구나. 하나의 세상, 그 세상을 향해 열려 있던 어떤 문이었구나.

그가 2인 식사권을 건넸다. 식사권을 받아 챙기며 고백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하루만 늦었어도 이 식사권은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더 이상 이곳에서 식사할 수는 없을 거라고. 종종 오겠다는 그 다짐은 이제 소용이 없겠다고. 가족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정말 문을 닫아요? 나는 속으로 되물었다. 알고 오신 거 아닌가요? 문 닫기 전에 식사권을 쓰려고 급히 예약을 한 것 아닌가요? 묻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빛이 답하고 있었다. 진짜 문을 닫는다고요?

마지막 주방 정리를 끝내고 난 후, 빈 주방에 혼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그동안 길을 들이느라 애를 먹었던 프라이팬들을 한쪽에 모아놓았다. 손등과 팔목에 수많은 상처와 흉터를 남겨왔던 오븐을 열었다 닫았다. 문어를 삶던 커다란 들통과 약간 찌그러진 스테인리스 그릇들을 눈으로 훑었다. 며칠 후면 중고업자들 손에 고물로 처리되어 사라질 것들이었다. 아쉬울 것은 없었다. 이미 쓸모를 다했으므로. 그것들과 함께한 삶을 끝내고, 그것들이 없는 삶으로 돌아갈 것이므로. 하나의 삶을 중단하고 다른 삶으로 돌입할 것. 그것이 진정한 끝과 시작. 할 만큼 했다. 냉정하게 돌아섰다. 그리고 또다시 우연처럼 운명처럼 내 발끝에 떨어져 있는 종이 한 장. 마지막 손님의 2인 식사권. 그의 책장에서 때마침 빠져나와 내 손에까지 도착한, 시작의 선언이자 끝의 통보.

뒤늦게 깨달았다. 그들에게 내가 먼저 연락을 취했어야 했다는 것을. 시작할 때 그러했듯, 마무리도 제대로 지었어야 했다는 것을. 내가 직접 쓴 엽서가 보였다. 덕분에 펀딩에 성공했으며, 모월 모일에 가게를 오픈하게 되었다, 언제든지 오셔서 식사를 해주시면 감사하겠다, 열심히 살겠다. 그런 내용이었다. 딱 2년 전 식당을 열기 바로 직전의 내가 거기 있었다.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어젖히고 있는 자, 시작하는 자, 아무것도 모르는 자, 모든 것이 고맙고 아름답고 싱그럽게 느껴지는 자. 그것을 받아 든 지금의 나는, 끝내려는 자, 닳고 닳은 자, 빨리 문을 닫고 도망가려는 자, 많은 것이 서럽고 억울하고 아쉬운 자. 이 둘이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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