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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가 있다. <시티홀>이라는 정치코믹로맨스이다. 최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도깨비>의 작가 김은숙이 이례적으로 ‘정치’를 다룬 드라마이기도 하다. 종영한 뒤에도 가끔 다시 꺼내보게 하는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데, 아마도 현실정치에 대한 환멸감이 극에 달했을 때 찾는 판타지나 환각제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인구 13만명이라는 가상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7년 동안 시장실 커피 심부름만 하던 10급 공무원 신미래이다. 전 남친의 빚 때문에 밴댕이 아가씨 대회에 나가고, 시 당국이 상금을 빼돌리려하자 1인 시위를 하며, 결국 시장이 되어 시민을 위한 진정한 ‘시정’을 펼친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물론 엘리트 정치인 ‘조국’과의 달콤하고 코믹한 로맨스와 동지애가 중요한 엔진 역할을 한다. 10급 공무원이 작은 도시의 시장이 되어 새로운 정치를 펼치고 조국이라는 국회위원과 사랑을 이룬다는 것은 물론 판타지이다. 그러나 시청자들에게 ‘사이다’ 같은 카타르시스와 웃음을 안겨줄 수 있었던 것은 이 판타지가 우리 현실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와 부패 위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서 인주시 원더우먼을 자처한 무소속 후보 신미래는 참모들이 건네준 화려한 공약 대신, 시민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말들을 건넨다. 그녀는 “공약은 이기라고 있는 거지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정치꾼의 말을 무시한다. 대신 그녀는 “지킬 수 있는 공약을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해마다 보도블록을 교체하지 않겠습니다. 정치비자금 안 만들겠습니다. 인사청탁 안 받겠습니다. 이권 개입된 그 어떤 시정도 안 펼치겠습니다. 안 하겠다는 것은 안 하겠습니다. 시민들과 밀고 당기기 안 하겠습니다’라고 힘주어 다짐한다.

화려하고 노련한 정치공학과 결별하고 오직 시민들의 눈높이에서 서툴지만, 진심을 담은 시정을 펼치는 신미래라는 인물을 보면서, 냉소와 한숨만을 안겨주는 현실과의 낙차만큼 환호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드라마의 끝에 가면 ‘정당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것, 정 떨어지고 치떨리는 것, 정기적으로 치사한 짓 하는 것’쯤으로 생각되던 정치의 의미가 그녀의 주장대로 ‘정성껏 국민의 삶을 치유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선거가 끝난 지 2주일도 채 안되는 동안, 드라마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이 법 하나 안 고치고 할 수 있는 일들이 이렇게나 많은 줄 정말 몰랐다. 인천공항의 비정규직이 웃고, ‘님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되고, 세월호 미수습자 영령이 돌아오고, 4대강 보가 열리고, 투명인간처럼 법문을 넘나들던 검사들이 ‘법 앞’에 서게 되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비정상의 정상화’일 뿐인데, 이토록 놀랍다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비상식의 일상을 살았나’를 절감케 한다. 

무엇보다 경이로운 것은 새 정부의 행보에 사람의 숨결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명문이라는 5·18 기념사를 글로 다시 읽어보았다. 문재인 대통령의 살아 있는 말보다 감동적이지 않았다. 진심과 결기에 찬 말, 가방을 뒤지는 아이와의 눈맞춤, 5·18 유가족을 끌어안는 온기가 문자와 행정시스템, 관료주의를 흔들고 현재의 대한민국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겨우 시작이다. 여느 때처럼 숱한 곤경과 시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분주함에는 좀처럼 꺼지지 않을 촛불의 힘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인 여기에 당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걸어왔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얼마나 많이 절망했는지를 생각해 본다. 5월의 바람에 밥 딜런의 노래가 들려오는 듯하다.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헤매야 비로소 진정한 사람이 되나/ 하얀 비둘기는 얼마나 넓은 바다를 날아야/ 모래 위에서 쉴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포탄들이 오가야/ 영원히 멈출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다네.”(<Blowing in the wind>)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걸까. 지금의 겨우 시작된 이 시작은 미처 이 자리까지 오지 못한 그분들 덕이다. 폴 발레리의 말대로 ‘바람이 분다’.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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