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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9호는 위헌이지만 그것을 발동한 행위는 불법이 아니라는 사법부의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민사3부는 그제 긴급조치 9호 위반을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20일간 불법구금돼 조사를 받은 최모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최씨에게 2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취지로 사건을 대전지법에 돌려보냈다. 긴급조치 9호가 사후적으로 법원에서 위헌·무효로 선언됐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서 국민 개개인에 대해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판결이다. “위헌이지만 불법은 아니다”라는 주장은 상식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을뿐더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우기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라며 그런 주장을 펴고 있지만 그것이 쿠데타나 철권통치를 정당화하는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헌법에 위반되는 행위로 개인에게 피해를 입히고도 배상 책임조차 지지 않는다면 그것을 어떻게 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 긴급조치 4호 사건을 맡은 비상고등군법회의 모습. 오른쪽 변호인석에 서있는 옆 모습의 인물이 한승헌 변호사(1974년 7월). (출처 : 경향DB)


이번 판결은 그동안 사법부가 내린 판결을 스스로 뒤집은 것이기도 하다.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 이른바 통치행위라 하여 사법심사를 스스로 억제할 수 있다 하더라도 기본권 보장, 법치주의 이념을 구현해야 할 법원의 책무를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2010년 판결 취지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법부는 긴급조치 1·4·9호에 대해 현행 헌법과 유신헌법에 모두 위반되어 애초부터 위헌·무효라고 판시하고 관련 사건 재심을 통해 잘못된 과거 판결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과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제 와서 다시 ‘고도의 정치적 행위’ 운운하며 긴급조치 발동행위에 면죄부를 준 것은 심한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대법원은 긴급조치 피해자 국가배상 청구소송에서 퇴행적 판결을 잇달아 내리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도 긴급조치가 위헌이지만 당시에는 유효한 법규였던 만큼 이를 집행한 공무원의 직무행위는 불법행위가 아니라는 논리로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번 판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동행위의 불법성마저 부정한 셈이다. 과거사에 대해 대법원이 역주행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올해는 긴급조치 발동 40년을 맞는 해다. 일제강점기 못지않게 우리가 기억하고 성찰해야 할 역사가 거기에 있다. 일본만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 의해서도 끊임없이 기도되는 과거사 부정의 망령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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