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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14년 자료를 살펴보면 하루에 약 200여권의 책이 대한민국에서 출간되고 있다. 저자의 나이도 싱그러운 10대에서부터 아직 열정이 식지 않은 80대까지 다양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일이 언뜻 보면 쉬운 듯 보이지만 사실 책을 쓴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책을 쓰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원고를 기획해야 하고 사진 등 관련 자료를 수집한 뒤 자신의 경험과 깨달음을 글로 옮겨야 한다. 이렇게 오랜 고통의 조각들이 모여 마침내 초고를 손에 쥐어 들면 마치 사랑스러운 아이를 출산한 어머니와 같은 심정이 된다. 그야말로 가슴 벅찬 순간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출간기획서라는 것을 작성해서 나의 글을 읽어주고 세상에 탄생시켜 줄 출판사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쓴 글의 장르와 맞는 출판사의 목록을 작성하고,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고 나면 이제부터는 끊임없는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된다. 출간기획서와 원고를 검토하는데 짧게는 몇 주에서 길게는 몇 개월까지 소요되기 때문이다.

매일 많은 책들이 출간되지만 애당초 베스트셀러와는 거리가 먼 안전관련 원고를 반겨주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사실 필자가 저술한 졸저의 경우에만 해도 많은 출판사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간신히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경우다. 자칫하면 내 책이 생명을 얻지 못하고 영원히 잠자는 책이 될 뻔했다.

혹자들은 책을 통해서 자신의 인지도가 올라가기를 바라고 인세와 같은 금전적 보상도 기대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소방인들의 책은 오직 안전한 대한민국을 소망하며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세상에 전달하는 의미 있는 봉사활동이면 그걸로 충분하다.

우리 소방인들은 다양한 현장을 경험하면서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굴곡 많은 인생을 살게 된다. 그 와중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주옥같은 순간도 겪게 된다. 하지만, 소중하게 얻은 것들을 글로 옮기지 않으면 금세 잊어버리게 된다.

현장은 결코 교과서로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불을 꺼 본 사람만이 화재현장이 얼마나 뜨겁고 무섭고 외로운지를 아는 이치와 같다.

현장에 대한 느낌, 교훈, 문제점 그리고 철학을 담아서 나만의 책을 만들어보자. 책을 쓴다는 것은 현장 전문가로써의 자부심을 지키면서 자신만의 전문성을 보여주는 숭고한 작업이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소방에서 일을 했지만, 퇴직 후에는 다른 업무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현장에서의 땀과 노력의 결실이 그저 한 사람의 추억의 정도에만 머무르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다.

100세 시대가 되면서 많은 소방인들이 퇴직 이후를 염려한다. 그래서 주식도 해 보고, 여기 저기 땅도 보러 다니고, 대학원을 진학하는 등 휑한 가슴을 채워 줄 무언가를 찾아 열심히 헤매고 있다.

하지만 퇴직 후가 진심으로 염려된다면, 더더욱 자신만의 책을 쓰라고 권하고 싶다. 자신이 쓴 책을 통해서 퇴직 이후에도 강의와 같은 재능기부도 할 수 있고,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시니어 봉사단원으로 지원해 다른 나라에서 노하우를 전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오랜 세월을 살아온 통찰력으로 본인이 원하기만 한다면 죽을 때까지 집필 작업을 계속 할 수도 있다.

그저 소주 한 잔 하면서 내뱉는 말들, 그래서 허공으로 사라져 버릴 말들을 꽉 잡아서 글로 옮겨야 한다.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사고현장도 마치 고해성사하는 심정으로 내 안에서 정화시키는 작업을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의 존재가치를 알아주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마음이 생길 때에도 글을 써야 한다. 근거에도 없는 말로 동료와 소모적인 논쟁을 해서 마음 상할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을 아껴서 보다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분명하게 걸고 책임 있는 말을 하는 것이다. 어설프거나 정확하지도 않은 글은 생명력도 없고 결코 인정받지도 못한다.

대한민국의 재난 현장을 누비는 우리 소방인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만의 글을 쓰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 땀과 노력의 결실들이 대한민국의 도서관과 서점에 넘쳐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대한민국에 안전 풍년이 왔으면 좋겠다.


이 건 | 주한 미공군 오산기지 선임소방검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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