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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어제 법무부의 청구를 받아들여 통합진보당을 해산하고 소속 국회의원 5명의 의원직을 박탈키로 결정했다. 9명의 재판관 중 야당이 추천한 김이수 재판관을 제외한 8명 전원이 진보당 해산 및 의원직 박탈에 찬성 의견을 냈다. 통합진보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를 해치는 만큼 정당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보다 해산의 필요성이 더 크다는 게 헌재의 최종 판단이다. 이로써 통합진보당은 창당 3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그러나 사법적 판단으로 정당이 해산된 것은 헌정사상 처음이어서 그 정치사회적 파장과 후유증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헌재는 결정문을 통해 “통합진보당의 최종 목적은 북한식 사회주의 실현”이라고 밝혔다. 종북세력이 당을 장악한 뒤 북한식 사회주의 모델을 이행하려 했다는 법무부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한 결과다. 헌재는 “통합진보당의 목적과 활동은 1차적으로 폭력에 의해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한 뒤 최종적으로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며 “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수 있는 구체적 위험성을 초래했다”고 해산 사유를 밝혔다. 그 구체적 근거로 내세운 것이 이석기 의원이 주도한 이른바 ‘RO(혁명조직)’ 회합이다. 헌재는 “경기동부연합을 축으로 한 구성원들은 당시 정세를 전쟁국면으로 인식하고 전쟁 발발 시 북한에 동조하여 국가기간시설 파괴와 통신 교란을 실행코자 했다”고 밝혔다. 진보당 활동 과정에 불거진 비례대표 부정경선, 중앙위원회 폭력 사건, 서울 관악을 지역구 여론조사 조작사건도 해산 사유의 하나로 들었다. 의원직 박탈 역시 명확한 법 규정은 없지만 정당해산제도가 갖는 헌법 수호기능이나 정당해산 결정의 실효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불가피한 결정이라고 판시했다.

헌재의 이번 결정은 사법기관이 민주주의 정치의 근간인 정당을 강제 해산시킨 초유의 일이다. 정당의 설립과 활동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다. 정당의 존립 여부는 선거를 통해 주권자인 국민의 선택에 맡기는 것이 순리다. 이런 면에서 헌재의 이번 결정은 납득할 수 없다. 정당해산권은 헌법 규정이긴 하지만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다. 국제적 권위를 인정받는 베니스위원회(유럽평의회 자문기관)의 정당해산 관련 지침을 봐도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해당된다. 민주적 헌법질서 전복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거나 폭력사용을 주장하는 정당에만 책임을 묻도록 하고 있다. 이를 감안하면 통합진보당의 정당활동이 해산 결정을 부를 만큼 폭력적이거나 급박한 위험이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헌법이 정한 정당해산권이 정치의 다양·다원성 보장을 위해 다수의 권력으로부터 소수정당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도입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결정은 더욱 역설적이다.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린 19일 서울 대방동 통합진보당 당사에서 한 당직자가 취재진의 촬영을 막기 위해 '근조 민주주의'가 적힌 종이를 문틈에 이어붙이고 있다. (출처 : 경향DB)


해산 결정의 논리적 근거가 타당한지도 따져봐야 한다. 헌재는 통합진보당 핵심 강령인 ‘진보적 민주주의’가 북한의 대남혁명전략과 전체적으로 같거나 매우 유사하다고 판단했다. 이해할 수 없는 논리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우리뿐 아니라 서구의 여러 정당에서도 흔히 통용되는 개념이다. ‘진보’라는 이름 앞에 무조건 종북 딱지를 붙인다면 대한민국에 멀쩡한 곳이 어디 있을까 싶다. 물론 통합진보당의 대북관과 그간의 정치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건 정치적 비판의 대상이다. 이석기 의원과 경기동부연합을 축으로 한 통합진보당 일부 당원들의 시대착오적 주의 주장도 용납될 수 없다. 그렇다 해도 당내 일부 세력의 문제를 들어 당 전체를 종북활동의 전위대로 규정짓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굳이 정당해산이라는 충격요법이 아니라 형사 사법절차를 통해서라도 충분히 의율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본다. 해산 결정의 주된 논거로 든 이른바 RO 모임 역시 실체가 아직 모호하다. 이 의원의 항소심에서도 RO의 실체는 물론 반체제 활동을 했다는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가 났다. 이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법률적 판단이 끝나지도 않은 사건을 서둘러 정당해산의 근거로 삼은 것은 석연치 않다.

정부가 정당해산심판을 청구한 과정도 순수성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됐지만 국가정보원과 국군 사이버사령부의 대선 개입 의혹이 정점에 달하면서 박근혜 정부의 치부가 드러난 시기였다. 헌재가 관행을 깨고 어제 특별 기일을 잡아 선고일정을 앞당긴 것도 절묘한 타이밍이다. 지금은 청와대 비선 실세와 정윤회 등의 국정농단 의혹을 놓고 국민적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는 시점이다. 정부와 여당이 정당해산청구라는 깜짝쇼를 통해 불법 대선 의혹을 넘긴 데 이어 이번 헌재 결정을 정치적 국면전환용으로 악용한다거나 또다시 ‘종북 몰이’에 나서 이념 갈등을 조장한다면 심각한 저항과 역풍을 자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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