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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성덕대왕신종의 주인공, 신라 성덕왕은 서기 722년 젊은 장정이 있는 집에 ‘정전’이라는 토지를 나누어주고, 그 소유권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조치를 했다. 온갖 세금과 부역, 그리고 귀족계급의 사사로운 수탈에서 민생을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이 조치는 농민의 소득을 보장하여 세수를 확충하고, 군역에 동원할 장정의 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해 준 묘책이었다(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서기 1608년 광해군은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동법’을 실시했다. 이로써 지방 특산물을 왕에게 바치던 공납은 현물에서 쌀로 대체되었고, 가호 기준이 아니라 토지 면적을 기준으로 세액이 결정되었다. 자기 토지가 없던 대다수 농민의 세 부담은 크게 줄었고 대부분의 토지를 가진 양반지주계급의 세 부담은 크게 늘었다. 일종의 조선시대판 부자 증세 정책이었던 셈이다. 이런 고강도의 개혁조치에 힘입어 조선은 7년에 걸친 조일전쟁의 참화를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민생 안정은 책임 있는 집권세력의 제일 과제이다. 그러나 2014년 한국의 집권세력에게서 이런 책임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들은 지난 대선에서 한없이 따뜻한 어머니의 마음과 손길로 국민의 모든 근심을 덜어줄 것처럼 약속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면 몰수하고 공짜 복지를 바라는 못된 심보를 버리라며 국민을 추상같이 꾸짖고 있다. 순진하게 이들의 약속을 믿은 국민만 속 터질 일이다.

우리나라의 대다수 국민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몇 개씩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아이 양육, 학원비, 대학 등록금, 일자리, 집, 병원비, 노후대책 등 수많은 근심거리 중 어느 것 하나만이라도 덜어낼 수 있다면, 삶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질 법도 하다. 그러나 삶의 무게를 덜어주는 것은 고사하고, 현 집권세력은 아이 점심밥 먹이는 것과 아이 돌보는 것까지 정쟁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양자택일을 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국민은 절박한데, 집권세력은 여유롭다.

현 집권세력도 민생을 이야기한다. 자칭 민생법안이라고 이름 붙인 법안들을 무더기로 국회에 제출해 놓고, 경제의 맥박이 약해진다며 조속한 통과를 연일 압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법안들에 담긴 민생이란, 학교 앞에 호텔을 짓고, 선상에 도박장을 허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교육과 의료서비스 영리화의 길을 터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것들은 민생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가뜩이나 팍팍한 민생을 털어먹는다.

물론 민생을 살리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에 알려진 것처럼 권력 핵심부는 민생과 하등 상관없는 권력 암투에 그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탕진했다. 집권 2년 동안 민생 안정에 허탕만 친 이유를 알 수 있다. 더 기가 막힌 일은 이들의 권력 암투는 세월호 사고 와중에도 그치질 않았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니, 국민의 안정된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은 고사하고, 생사의 위기에 처한 국민조차 ‘보호’해주지도 못했던 것이다.

집권층들이 민생을 살리고자 제출한 민생법안들이 오히려 민생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다. 이를 과연 민생법안이라 부를 수 있을까. (출처 : 경향DB)


민생을 걱정하는 이라면 그 누구도 집권세력의 실패를 바라지는 않는다. 집권세력의 실패로 인한 고통은 오롯이 국민의 몫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정부가 “다른 것은 몰라도 민생 안정을 위해서 이것 하나만은 똑 부러지게 해냈다”는 후세의 평가를 받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아직 3년이나 남았다. 국민의 모든 근심거리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급한 한두 개는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신라와 조선 후기, 집권세력은 구중궁궐 암투와 그들만의 권력놀음에 몰두했고 나라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예전의 개혁 조치들은 실종되거나 유명무실해졌다. 집권세력이 민생을 놓아버리자 백성의 삶은 이내 피폐해졌다. 각자도생으로 제 살길을 찾던 백성들은 도적 떼로 둔갑했고 전국 곳곳에서 농민반란이 터져 나왔다. 신라와 조선의 망국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민생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 이것이 책임 있는 집권세력이라면, 뼈아프게 새겨야 할 역사의 교훈이다.


이진석 | 서울의대 교수·미 텍사스보건대학원 교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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