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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일자 지면기사-

먼 곳에서,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한줄기 빛이 내리꽂히는 동굴 속 같기도 했다. 바싹 말랐지만, 그래서 소리의 윤곽이 부서지는 듯했지만 울림이 있었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짧은 여백과 단호한 종결어미가 듣는 이를 긴장시켰다. 감정이 거의 실리지 않은 절제된 낭송이었는데도 흡인력이 있었다. 아마 다른 시인의 시였다면, 또 내가 모르는 분이 낭송했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며칠 전, 후배가 짧은 동영상을 보내왔다. 무심코 열어보았다가 얼굴이 벌게졌다. 대학 은사께서 내 시를 낭송하는 것이었다. 후배는 ‘벌써 몇 번 보셨겠지만’이라는 문자를 덧붙였다. 그런데 나는 처음이었다. 2016년 여름, 은사께서 내 시 <손의 백서>를 한 일간지에 소개한다고 연락한 적이 있다. 나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얼마 후 신문에 실린 노인문학자의 에세이를 읽고 또 읽었다. 졸시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비평의 위력을 새삼 실감했다.

그러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일 년 반 만에 듣는 은사의 육성은 무심하고 게으른 시인에 대한 질타로 들렸다. <손의 백서>는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디지털 문명을 배경으로 ‘손의 생태’를 다양한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손을 주제로 한 시가 몇 편 더 있고, 다른 시에도 관련 이미지가 종종 출현해서 나로서는 이제 손과 작별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해왔는데 그게 아니었다. 뒤늦게 은사의 음성을 들으면서 척추를 곧추세웠다. 손은 여전한 미답지였다. 손은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고 또 미래였다.

내가 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필기구였다. 막대기와 붓, 연필에서 출발해 볼펜, 샤프펜슬, 만년필을 거쳐 타자기, 워드프로세서, 노트북, 스마트폰과 가까워지는 동안 내 손이 하는 일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만드는 손에서 조작하는 손으로 바뀌었다. 그사이 도구가 사라졌다. 직접성이 축소됐고 감성이 왜곡됐다. 나와 타인, 나와 대상 사이에 디지털 단말기가 끼어들었다. 문자가 전화 통화를 대신하고 자동주문기가 종업원을 내몰고 인터넷이 창구 직원을 없앴다.

아랍사회에 널리 알려진 우화가 있다. 할아버지는 낙타를 타고 아버지는 자동차를 타고 아들은 비행기를 탄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실의 진술이다. 그다음에 반전이 일어난다. 아들의 아들, 즉 할아버지의 증손자는 다시 낙타를 탈 것이라는 예언이다.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만 지구적 차원에서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염려하는 생태론에 비춰보면 한쪽 귀로 흘려버릴 농담이 아니다. 비관적 생태론은 과연 증손자가 탈 낙타가 살아있겠느냐고 안타까워한다.

미래세대가 다시 낙타 등에 오른다는 우화는 우리 산업문명에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 할아버지는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고 아버지는 도구를 만드는 기계를 만들어 팔고 아들은 기계가 만든 제품을 사서 쓰다가 버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아들의 시대’는 자기가 선택한 제품, 이를테면 시계나 냉장고, 컴퓨터, 자동차를 고치지 못한다. 수리가 불가능하다. 부품을 교체하거나 새로 구입해야 한다. 여기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제품에 탈이 나게 하는 ‘노후화 기술’이 가세한다. 손의 거처가 바로 여기다. 제품을 사서 쓰다가 버리는 일상적 행위를 우리 손이 반복한다.

요즘 <손으로, 생각하기>(매튜 B. 크로포드, 윤영호 옮김, 사이 펴냄)를 읽고 있다. 정치철학을 전공하고 워싱턴의 싱크탱크에서 일하다가 모터사이클 정비사로 변신한 크로포드는 ‘손을 쓰며 사는 삶’의 풍요로움을 되찾자고 주장한다. 크로포드는 손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인간이 행위주체성과 자율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크로포드는 ‘인터넷만으로는 못을 박을 수 없다’는 경제학자 앨런 블라인더의 지적을 인용하면서, 손의 역할을 되찾아 ‘의존하는 인간’에서 벗어나자고 제안한다.

의존하는 삶이 일반화된 이유는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다. 그중 하나가 ‘창의성의 역설’이다. 위 책에 따르면, 인간의 뛰어난 창의성이 그 창의성의 필요성을 제거하는 데 사용된다는 것이다. 특히 기업에서 지식, 기술, 의사결정의 주체를 직원에서 사업주로 바꾸는 데 창의성이 적극 활용된다는 것이다. 직업도 인공지능에 의해 양분된다. 인간의 개입 여부, 규칙의 존재 여부에 따라 일자리가 재편된다는 것이다. 위 책은 교육 현장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육체노동에 대한 교육을 외면하는 것은 반인간적일 뿐 아니라 실용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손기술을 익히는 데 더 많은 지식과 경험, 공감, 협력이 필요하며, 그래서 손기술을 가진 청년들의 미래가 더 밝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손을 되찾는 일은 감성을 온전히 복원하는 일만큼 쉽지 않은 문명사적 기획이다. 결국 개인의 차원에서 전환을 도모해야 한다. 국가와 기업, 학교는 멀리 내다보려 하지 않고 또 인간을 중심에 올려놓으려 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먼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설정하는, 다시 말해 스스로 법을 제정하고 그 법을 준수하는 ‘자유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자유인의 삶은 손을 통해 풍성해지고 손을 통해 사회적으로 확대된다. 손의 주요 역할이 다른 손, 다른 생명, 다른 사물과 연결하고 연대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거론한 은사의 비평은 손이 다른 손을 붙잡을 때 기적이 일어난다며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손과 손의 만남이 “이 시대 삶의 곤경을 뚫고 나갈 궁극적인 힘과 희망의 기원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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