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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일자 지면기사-

얼마 동안 연도를 잘못 적을 수도 있겠구나, 송년 모임에서 못 만난 그리운 사람을 위해 신년회를 해야겠구나. 출판사 한 해 출간 계획 회의를 하면서 몹시 긴장하겠구나. 새해라는 게 아직 실감 나지 않은 나는 한 해에 거는 기대와 각오보다는 일상생활을 옷매무새 다듬듯 더듬거리며 점검하는 심정이 앞섰다.

편집자라는 일정한 직업을 갖게 된 이후 한 해를 보내는 회한과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보다 더욱 소중하게 여겨지는 건 하루의 평안과 안도감이었다. 이를테면 내게 성공적인 날이란 원고 계약을 했거나 중요한 책을 출간한 기록이 남는 날이 아니라, 그날 잠자리에 누웠을 때 하루 동안 책을 만들며 보고 겪었던 머릿속 영상이 빨리 멈추는 날이다.

편집 일이나 인간관계에서 꼬이고 엉긴 날에는 잠자리에 누웠는데도 그 상황의 영상이 지속적으로 돌아간다. 그때 하지 못한 말, 하지 말았어야 할 말들을 혼잣말로 내레이션해가면서 말이다. 그 반복된 영상은 잠자리에서 악몽을 불러오기 일쑤였다. 한편 출판 기획 아이디어가 넘치는 날의 잠자리도 문제였다. 느닷없이 일어나 메모지를 찾거나, 책장을 서성거리며 몽유병자처럼 굴었다. 직업병이 인생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어느 때부터인가 잠자리에서 평안을 찾는 방법을 궁구했다.

그중 하나는 지금 출간 작업과 무관한 책 읽기에 몰두하는 것이다. 하필 또 책이냐 싶겠으나 책을 읽는다는 게 스스로 처방한 것 치고는 우스꽝스럽지만 꽤 효과가 있다. 잠자리에서는 고전이나 예술서를 주로 읽었다. 시공간을 넘어 내 일상과 먼 이야기들은, 지금 내가 고민하는 하루하루를 거대한 우주의 작은 퍼즐 조각 맞추기 정도로 그 무게를 가볍게 해주었다. 하루가 소중하지만 그 하루 때문에 인생 전체가 망한 것은 아니라는 낙관이 생기기에 좋은 독서법이었다. 하루하루의 퍼즐이 모여서 이루어진 인생이니, 잘못 맞춘 퍼즐은 수정하면 된다는 회복력도 늘어난 듯했다.

또 하나의 방법은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상상 속에서 불러내어 반드시 이렇게 주문처럼 외우는 것이다. “당신은 나를 제대로 이해 못했다. 그런 당신은 나에게 뭐라 말할 자격이 없다. 그러니까 당신의 말은 무효.” 상처를 다독일 수 없으니 상처의 원인인 상대방의 말을 무효화해버리는 것이다. 잠자리에서 상대방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따져보지도 않는다. 나의 잠자리를 위해서 일단 무효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으로도 쉬 평온해지지 않는 잠자리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새로운 방법을 깨쳤다. 90세 현역으로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일하는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선생을 뵈었을 때 들었던 살아 있는 조언이었다.

“안 좋은 생각이 들면, 또 뭔가 무기력해지면 벌떡 일어나서 움직여요. 곰곰이 그 생각에 붙들려 있지 말고 그 자리에서 일단 일어나는 거죠. 그 무슨 ‘5초의 법칙’이란 것 있잖아요. 잡념이 생기면 몸을 5초 안에 일으켜 세우라는 것.”

나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살았나 보다. 잠자리에서 각본, 감독, 주연배우까지 홀로 맡은 영상을 돌리고 있었으니. 그래서 요즘은 잠자리에 누워 영상이 멈추지 않으면 일단 일어선다. 그리고 몸을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요가 매트를 깔아놓고 호흡을 조절하면서 스트레칭을 하는 것이다. 달밤에 체조하는 것. 생각보다 괜찮은 방법이었다.

몸을 움직이면 나란 존재감이 물질적으로 확연하게 느껴진다. 일하고 먹고 걷고 자는 몸의 동력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면서 잠을 설치면서까지 당장 해결할 일이 있단 말인가 자문하게 된다. 자고 일어나면 내일은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긴다.

<라틴어 수업>으로 널리 알려진 한동일 교수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로마 유학 초기에 대중교통을 이용해 통학했는데, 한 선배가 자신이 타던 오토바이를 선물로 주었다고. 학교에 오가는 시간이 줄어드니 급하게 자료를 찾으러 도서관에 다녀올 수도 있고 최대한 공부에 집중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처음엔 기뻐했단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체중이 불어나고 몸 컨디션이 나빠져서 공부를 못하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이야기. 꽤 많은 거리를 걸으며 자연히 운동했을 때의 몸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면서, 몸 관리를 꾸준히 하는, 삶의 중요한 미덕을 강조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을 수도 있는 법. 오늘 하루 잘 안 풀렸다면 내일은 다를 수도 있겠지. 하루의 끝에 주어진 잠자리는 온전히 내 것이다. 잘 자자는 데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이제 새해다. 나 자신에게 말했다. “산뜻한 결심, 다 됐고, 무조건 하루치의 잠은 꾸준히 누리자!”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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