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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동아시안컵 한·일전에서 한국 측 응원단이 펼친 대형 현수막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들은 이순신 장군과 안중근 의사가 그려진 현수막도 내걸었다.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비판한 것이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은 이에 “극도로 유감”이라며 “국제축구연맹(FIFA) 규약에 근거해 적절히 대응하겠다”고 말해 자칫 국가 간 갈등으로 비화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의사 표현은 스포츠 정신보다 앞선다는 믿음이 만들어낸 이런 사건들은 한국적 국가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국제 경기에서 메달을 따면 군대를 면제해주고 연금을 지급해 특정 선수의 스포츠 실적을 국가 위신을 높이는 위업으로 간주해왔다. 지난해 런던올림픽 한·일전에서도 한 선수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쓴 카드를 흔들어 FIFA로부터 제재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도 이를 애국적 행동으로 받아들이고 면죄받아야 한다는 온정주의가 만연했다. 물론 일부 일본 관중도 축구장에서 우리에게 군국주의 상징으로 인식돼온 ‘욱일승천기’를 흔드는 등 종종 민족주의적 표현을 했다. 일본 역시 한·일전을 민족 대결로 몰아가는 데 일조를 한 것이다. 



한·일 두 나라 축구팬들은 축구장을 정치대결의 장처럼 여겼다. 특히 한국 응원단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 증오를 표출했다. 응원단을 한민족의 대표자로 자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축구장은 아베 정권의 과거사 부정에 대해 책임을 묻는 심판장이 아니다. 그걸 표현하고 싶으면 축구장 밖에서 하면 된다. 축구는 축구이고 스포츠는 스포츠이다. 선수가 정해진 규칙에 따라 땀흘리며 경쟁하는 멋진 광경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은 경기장을 찾는다. 선수들은 국가나 소속팀을 대표해 자신의 명예를 걸고 각자의 기량을 뽐내기 위해 나온다. 적을 무찌르고 국가의 영광을 실현하기 위한 전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축구장에서 상대를 정치적으로 공격하거나 자극하는 일을 할 이유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스포츠 정신을 훼손하고 국제규범을 어기는 행위이다.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축구장에는 국가의 대표자나 국가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시민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그들 사이의 관계는 한·일 국가관계가 아니라, 축구를 즐기는 시민 대 시민의 관계이다. 증오를 부추기는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그런 행태를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성숙한 사회라면 그래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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