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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모자를 벗으시오. 저기 천재가 들어오고 있소.”
1832년, 슈만이 동년배 피아니스트인 쇼팽을 독일 음악계에 소개하는 유명한 평론에서 한 말이다. 그 자신이 뛰어난 작곡가이자 영향력 있는 비평가였던 슈만의 단호하면서도 품격 있는 이 말은, 그 후 예술계에서 진실로 격찬할 만한 천재를 널리 알릴 때 재인용되곤 한다. 이는 신예 작가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당대의 비평가이자 사상가인 벨린스키가 다급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새로운 고골이 탄생했소’라고 외쳤던 사건만큼이나 예술사의 극적인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여적]쇼팽의 음악 (출처: 경향DB)
나도 슈만의 이 열렬한 문장을 슬쩍 옮겨 써본 적 있다. 2005년의 일이다. 예술계의 신예 천재를 향한 격찬은 아니었고, 어느 축구 유망주를 위해서였다. 박주영이 그 주인공이다.
고교 시절에 이미 초특급 공격수로 주목을 받았던 박주영은 2005년 FC서울에 입단해 새로운 스타에 목말라 하던 K리그를 미증유의 신드롬으로 몰아넣었다. 그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축구장을 찾았다. 그가 출전하는 경기는 프로축구 생중계에 인색했던 공중파로서도 매력적인 콘텐츠였다. 비록 청소년 대표팀에서 큰 활약은 했지만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지도 않은 ‘유망주’가 전국적인 흥행 아이콘으로 떠오른 사례는 박주영 이전에는 없었고 이후에도 아직 없다.
그 무렵 어느 도시에서 벌어진 K리그 한 장면을 기억한다.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그 구단은 관중을 모으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도모했는데, 그 하나의 방법으로 내걸었던 인상적인 현수막이 기억난다. 신생 구단이라 전국구 스타가 없었기 때문에 고심하던 그 구단은 마침내 이런 문구를 시내 곳곳에 내걸었다. “박주영, 너를 기다렸다.”
그러나 당시 대표팀을 이끌던 조 본프레레 감독은 “바람이 불면 쓰러질 것 같은 선수”라고 저평가했다. 대다수의 축구 전문가와 팬들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판단이었다. 독일월드컵 최종예선 2차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완패하자 박주영을 선발하라는 여론이 크게 일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박주영에 관한 칼럼을 쓰면서 슈만의 문장을 인용했던 것이다. “모자를 벗으시오. 저기 천재가 들어오고 있소.”
그런 우여곡절 끝에 박주영은 대표팀에 선발됐고 우즈베키스탄전에 출전해 A매치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터트렸다. 경기 종료 직전에 성공시킨 영양가 높은 동점골이었다. 닷새 후에도 박주영은 쿠웨이트 원정을 가서 왼발 선제골을 작렬시켰다.
그 후의 희로애락은 우리 모두가 목격한 바와 같다. 우리 모두는 박주영으로 인해 몇 년 동안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많이 갖게 됐다. 특히 2012 런던올림픽 한·일전에서 성공시킨 골은 요즘 흔히 쓰는 말대로 박주영이 왜 박주영인지를 증명한 골이었다. 그와 동시에 우울한 나날도 꽤 길어지고 있다. 최근 들려오는 뉴스는 그가 소속팀 아스널에서 부활의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고 하는데, 아직 이렇다 할 소식은 없다. 프랑스, 잉글랜드, 스페인 등을 전전하면서 그가 치른 고생과 수모는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골을 성공시킨 박주영이 특유의 ‘날개 세리머니’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박주영을 대표팀에 기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속속 제기되고 있다. 극심한 골 가뭄 때문이다. 홍명보 감독도 이청용, 기성용, 지동원, 김보경 등과 아울러 특히 박주영의 상태를 판단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날아갔다. 그 모든 선수들이 최고 수준을 유지한다면 잉글랜드 무대는 물론 한국 대표팀에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특히 박주영의 기량 회복은, 예측을 불허하는 그의 공간 상상력에 의해 대표팀 공격 전개의 수많은 옵션을 가능케 할 것이다. 좌측면에서 기회를 엿보던 박주영이 수비수 두세 명을 뒤흔들면서 대각선으로 질주하기만 해도 그 순간 한국의 공격형 미드필더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공격 옵션은 최소한 세 가지 이상 발생한다. 그 자신이 골을 넣거나 예리하게 패스를 하거나 헝클어진 수비라인 배후에서 구자철이나 지동원이 슛을 날리는 모습은, 우리가 금세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이다.
이런 선수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과거에 차범근이 있었고 황선홍이 있었다면 여전히 우리에게는 박주영이 있다. 한 세대에 한 명 정도 나타나는 천재다. 이들의 골 감각이나 공격 본능은 그야말로 천부적인 감각이며 태어나면서부터 그들의 몸속에 내장된 것이다. 가르쳐서 될 일이 아니며 노력한다 해서 습득될 일도 아니다.
물론 일종의 천재주의 혹은 영웅주의에 대해 나는 비판적이다. 전체로서의 역사도 그렇고 각 부분의 일도 그렇고, 소수의 천재나 영웅이 모순과 아비규환을 끝장낸다는 식의 발상은 위험하다.
그럼에도 나는 박주영이 대표팀에 발탁된다면 망설임 없이 모자를 벗을 것이다. 스포츠라는 비적대적인 공간에서 비범한 선수가 천부적인 상상력과 놀라운 몸놀림으로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노력해서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어 누구도 밟아보지 못한 지평을 펼쳐내는 것은 지극히 아름다운 일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초월의 환영을 보게 된다. 박주영이 그런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면 박주영 개인에게나 한국 대표팀 전체에나, 그리고 지루하고 남루한 일상에 지친 우리 모두에게 짜릿한 터닝포인트가 될 것이다.
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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