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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탈리아 축구는 홍역을 앓고 있다. 1980년대만 해도 유럽의 축구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자전했으며 1990년대 이후에도 세계적인 스타들은 반드시 이탈리아를 최종 목적지로 삼았다. 그랬는데, 지금은 경유지 정도로 여긴다. 우선 2006년에 터진 ‘칼치오폴리’, 즉 이탈리아 프로축구 최상위 팀들이 연루된 승부조작, 뇌물, 부패 사건의 후폭풍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역대 최강자인 유벤투스가 하위 리그로 강제 추방당했고 승부조작에 연루된 감독·심판·단장 등이 대거 유죄 판결을 받았다.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일부 관계자들의 우발적인 모의가 아니라 이탈리아 사회 특유의 얽히고설킨 ‘유사 가족주의’가 낳은 구조적인 사건이라고 말한다.


일부 선수는 감독만 바라보고 감독은 비굴한 표정으로 심판을 바라보고 심판은 의미심장한 미소로 단장을 바라보고 단장은 구걸하듯이 구단주를 바라보는, 그 누구도 팬을 의식하지 않는 이 거대한 ‘유사 가족주의’는 이탈리아 현대사의 헝클어진 실뭉치다. 


창단 초기부터 이탈리아 축구를 주도해온 유벤투스는 조반니 아넬리로 비롯되는 거대 자동차그룹 피아트와 역사를 같이한다. 그는 파시스트가 아니었지만, 그리고 미국의 자동차 회사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일정 수준의 복지 정책을 토리노 공장에 실시했지만, 무솔리니 정권과 동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유벤투스는 전무후무의 승전보를 기록했으며 무솔리니 몰락 이후에도 이탈리아 축구를 지배했다. 축구와 정치의 검은 거래를 추적해 온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의 저자 프랭클린 포어는 “유벤투스는 아넬리 집안의 장난감”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아넬리 가문의 ‘축구 통치’에 도전한 것이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AC밀란을 통한 ‘축구 정치’다. 이탈리아 여론을 한순간에 좌우할 정도로 막강한 미디어 재벌이었던 그는 1986년 AC밀란을 거머쥔다. 베를루스코니는 이 명문 클럽을 이끌고 정치의 핵심으로 돌진했다. 축구장의 익숙한 구호에서 따온 ‘전진 이탈리아’라는 정치 세력을 통해 그는 세 번이나 총리 권력을 누렸다. 


AS 로마와 AC 밀란전에서 AS 로마 팬들이 인종차별 응원가를 불러 경기가 잠시 중단되고 있다. (AP연합)


베를루스코니에 의하여 미디어와 축구와 권력이 정교한 패스워크를 벌이자 이번에는 승부조작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생겨났다. 인종차별이 그것이다. 그 이전만 해도 축구장에서의 인종차별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극우파 정치인의 미디어는 파시스트들에게 축구장의 문을 열어주었다. 때마침 유럽을 강타하고 있는 경제위기는 이탈리아 축구장을 인종차별의 콜로세움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지금 이탈리아 축구장은 승부조작의 여파와 극심한 인종차별의 수렁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우리의 스포츠 현장은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아직 자유롭다. 그러나 ‘아직’ 그렇다는 것이지 이 같은 위험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2년 전, 프로 스포츠 전체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승부조작 파문이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았다. 축구협회는 지난 2년 동안 경기국 직원 및 경호업체 직원까지 각급 리그 현장에 파견해 불법 베팅을 막고 있다. 불법 베팅은 승부조작과 직결되는 사안인데 그동안 20명 가까이 적발돼 경찰에 넘겨졌고 최근에도 챌린저스리그(4부리그)에서 무려 5명이나 현장에서 적발됐다. 지난달 말에는 인천의 어느 태권도 인사가 편파판정과 승부조작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목숨을 끊는 일까지 있었다.


‘아직’ 축구장을 오염시킬 정도는 아니지만 인종차별 행위도 더러 보인다. 포항의 어느 선수는 베이징에서 뛰고 있는 흑인 선수에 대한 모욕적인 표현을 했다가 급히 철회한 적 있고 국내의 어느 축구팬도 잉글랜드 리그에서 뛰는 선수의 트위터에 모욕적인 표현을 썼다가 거듭 사과한 적 있다. 미디어의 오랜 언어 관습도 여전하다. 외국인 선수를 ‘용병’이라고 표현하거나 ‘흑인 특유의 탄력’이라는 식의 차별적이고 위험한 표현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만약 우리 사회가 동아시아의 경제 중심으로 급변하게 되고 나아가 북한의 다양한 변화 혹은 위기까지 겹치게 되면 장차 우리의 축구장에서 이 같은 현상이 더욱 두드러질 것은 자명하다. 


사회의 경제위기나 복합적인 상황은 축구장의 온도를 급속히 끓어오르게 한다. 여기에 이념, 아니 이념 수준에도 이르지 못하는 파괴적인 정념이 뛰어들면 그 순간 축구장은 극우적 감정이나 야만적 인종차별의 화약고로 변하게 된다. 사회 내부의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축구장, 아니 사회 전체가 이성의 작동이 중지된 야만의 공격 상태로 급변하는 것이다.


정대세 (경향DB)


어느 논객의 무분별한 촉발로 인해 수원 삼성에서 뛰고 있는 정대세 선수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어찌 보면 작은 소동이다. 그러나 축구협회와 프로축구연맹 그리고 소속 구단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더 큰 문제로 비화할 수도 있다. 정대세를 보호하는 것은 이념 수준에도 이르지 못한 낡고 닳은 ‘종북좌빨’ 표적놀이로부터 축구장을 보호하는 것이다. 사회 내부의 갈등과 위기를 외부인을 겨냥해 발산하는 것은 파시즘의 흔한 징후다. 장차 발생할 수도 있는 이념 투쟁, 지역 갈등 혹은 인종차별의 위험한 사냥놀이로부터 축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협회와 연맹과 구단은 이 위험한 불장난을 막아야만 한다.



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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