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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홍명보의 아이들’이 대표팀에 발탁됐다. 지난 11일 홍명보 대표팀 감독이 동아시안컵 대회 참가 명단을 발표하자 언론이 일제히 표현한 문구다. 그래서 따옴표를 쳐봤다. ‘홍명보의 아이들’ 말이다. 어떤 언론은 ‘대거 발탁’이라고도 썼다.


런던올림픽 참가를 기준으로 보면 정확히 7명이다. 최종 엔트리 23명 중 7명이면 ‘대거 발탁’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조금 범위를 넓혀 홍 감독이 올림픽 팀을 맡았을 때 합류했던 선수들을 더해보면 15명이다. 이 정도면 ‘대거 발탁’이라고 부를 수 있으나 맥락을 보면 반드시 ‘홍명보의 아이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다.


홍 감독은 “예비 40명 중 브라질월드컵에서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판단되는 선수들 위주로 선발했다”고 말했다. 행간의 의미는 분명하다. 이미 기량이 검증된 선수는 선발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번 대회는 국제축구연맹(FIFA)이 정한 공식 A매치에 포함되지 않는다. 유럽 구단의 차출 의무가 없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서 뛰는 15명, 일본에 진출한 7명 그리고 중국에 진출한 김영권(광저우)으로 구성됐다.


(경향DB)


이미 기량이 검증된 선수들 대신 젊은 선수들로 구성하다 보니 평균 연령도 24.7세로 낮아졌다. 전임 최강희 감독이 처음 꾸렸던 대표팀보다 4살가량 낮아졌다. 이 연령에 해당하는 손흥민, 기성용, 구자철, 윤석영 등이 제외된 것까지 고려하면 홍 감독이 동아시안컵 대회를 ‘검증’의 기회로 삼겠다는 의지는 확고해 보인다.


지금 누가 새로 감독이 됐다 해도 이렇게 선발했을 것이다. 굳이 해외에 진출한 선수들이나 실력이 검증된 국내의 중고참 선수들을 불러모을 까닭이 없다. 주로 20대 초반의 선수들로 구성할 수밖에 없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선수들은 대개 런던올림픽에 이름을 올렸었다. 이를 ‘홍명보의 아이들 대거 발탁’ 이렇게 표현하면 마치 모든 것이 가능한 조건에서 일부러 런던올림픽 선수들만 뽑은 듯한 인상을 준다.


언론의 이런 호명은 위험하다. 23명 중 7명을 특정해 ‘홍명보의 아이들’이라고 부르게 되면 이제 동아시안컵 대회는 이 프레임으로 판단하게 된다. 23명 가운데 선발 11명이 뽑힐 텐데 그중 몇 명이 ‘홍명보의 아이들’인지부터 따질 것이다. 각 포지션마다 한두 명 정도는 런던올림픽에 출전했던 선수가 뛸 텐데 그 활약 여부를 두고 ‘홍명보의 아이들, 쾌속 질주’ 혹은 ‘홍명보의 아이들, 스타의식에 젖어’ 식의 기사가 나올 수도 있다.


‘기성용 파문’ 때도 언론은 낡은 프레임에 스스로 갇혔었다. 세상사는 다양한 원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하나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의 저자가 말했듯이 ‘인류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자기에게 제기한다.’ 다시 말해 어떤 문제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이미 안고 발생한다.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려면 그 사태 안에 잠복돼 있는 열쇠를 찾아내야 한다. 사태의 진면목이 무엇인가를 성찰해야 그 희미한 틈새가 보인다.


이런 복잡한 일 대신 단순하게 접근하는 법도 있다. 흑백논리가 그것이다. 이 시선으로 보면 세상사가 양편으로 확연히 갈라진다. 이어 찬반양론이 들이닥친다. 이제 사유는 금지되고 흑백 혹은 찬반의 칼날이 춤을 춘다. ‘기성용 파문’은 이렇게 하여 금세 여론재판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선수도 지탄을 받았고 감독도 비난을 받았으며 축구협회도 원성을 받았다. 명확한 책임자가 거론되지 않는 상황에서 ‘협회’라는 큰 덩어리 전체를 거론하는 것은 아무런 비판을 하지 않는 셈이지만 어쨌든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언론만 제외하고 말이다.


출국하는 기성용 (경향DB)


과연 이런 사태에 관해 언론은 책임이 없는가. ‘해외파’와 ‘국내파’라는 표현이 활동하는 지역을 말해주는 단순한 분류표를 넘어서 이제는 보이지 않는 ‘세력’처럼 됐다. 이 ‘세력’을 만든 것은 언론 아닌가. ‘이번에는 해외파가 총출동했다’고 누가 말했던가. 협회가? 감독이? 선수가? 아니다. 큰 대회가 있을 때마다 언론이 우선 대서특필해 눈길을 끌고자 하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론은 낡은 언어를 자주 쓴다. ‘천금 같은 결승골’, ‘벼락같은 중거리슛’, ‘왼발의 달인’ 등 이런 진부한 표현들은 단지 어휘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사유의 부족을 드러낸다. 외국인 선수를 ‘용병’이라고 쓰거나 아프리카 쪽 팀이나 선수들을 ‘탄력 넘치는 에너지’ 같은 육체적 수사로 한정하는 것도 그렇다. 아프리카 감독이나 선수들에 대해 ‘지략가’나 ‘지능적인 플레이’ 같은 말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드물다. 과연 그들은 머리를 헤딩할 때만 쓴단 말인가.


세대의 감성 변화, 애국주의와 대중 스포츠, 세계화와 인종주의, 미디어의 재현 방식과 오리엔탈리즘, 스포츠와 팬덤 현상 등에 대해 제대로 사유하지 않은 언어들이 언론에 넘쳐나다 보니 ‘기성용 파문’에 대한 언론의 충고 또한 ‘일벌백계’, ‘기강해이’, ‘위계질서’ 같은 20세기 중엽으로 되돌아갔다. 이는 그토록 뜨거웠던 그 문제에 내장돼 있는 해결의 열쇠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이제는 ‘홍명보의 아이들’까지 등장했다. 이 프레임은 위험하다. 언론이 또 하나의 분파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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