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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년 계약’으로 결론이 났다. 새로 축구대표팀을 맡게 된 홍명보 감독 얘기다. 지난주에 이미 허정무 부회장은 홍 감독과 ‘교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 후 며칠 동안 아마도 ‘밀당’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의미 있는 밀당 말이다. 차기 감독의 ‘임기 보장’은 중요한 지렛대다. 히딩크 이후로 수많은 감독들이 선수 파악과 전술 운영을 몇 차례 하다가 중도에 그만두었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홍 감독으로서는 브라질월드컵으로 끝나는 단기 계약이 아니라 최소 3년 이상의 임기를 원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자리 욕심이 아니라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밀당’이다.
2010 남아공 이전의 역사는 거론할 필요도 없이 전임 조광래, 최강희 두 감독의 경우만 봐도 ‘임기 보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당장은 브라질에서의 승전보가 중요하다. 그러나 2014년 이후에도 인류는 축구를 한다. 1년 후에 또 다른 누군가가 원점에서 신인을 찾고 해외파와 국내파를 조율하고 프로축구 구단들과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면 꼭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허비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협회가 결심을 했고 홍 감독은 이에 부응했다. 이에 몇 가지 당부를 하고 싶다.
홍명보 올림픽팀 감독 기자회견 (경향DB)
무엇보다 2012 런던올림픽의 영광을 말끔히 잊어야 한다.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동메달은 축구사의 전설이 됐고 ‘애국가’의 자료 화면이 돼도 좋을 만큼 역사가 됐다. 그 주인공인 홍 감독으로서는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겠지만, 지금 그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월드컵 대표팀을 맡은 신인 감독이다. “우승은 어제 내린 눈일 뿐”이라는 토털 사커의 창시자 리누스 미헬스 감독의 명언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지 각오를 새롭게 하자는 권유가 아니다. 올림픽에서 함께 뛴 선수들과 그렇지 않은 선수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유리벽부터 철거해야 한다. 월드컵에는 나이 제한이 없다. 가뜩이나 그라운드 안에서 중심을 잡아줄 선수가 없다는 얘기가 들리는 판인데 10대 후반의 유망주부터 30대의 관록 있는 선수들까지 운집할 월드컵 대표팀에서 올림픽 멤버가 별도의 행성처럼 움직여서는 안된다.
다음으로 시스템을 생각하고 싶다. 1년밖에 남지 않았지만 아직 1년이나 남은 상태다. 국내파 감독, 특히 홍 감독을 사람들이 주목했던 것은 선수를 파악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이점 때문이다. 누군가 한국의 선수들에 대해 물어보면 홍 감독은 수십 명의 선수들의 경기력이나 장단점, 성격이나 취향, 연애 비사 등을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대표팀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시간적 여유를 벌게 됐다. 시스템이라는 측면에서 한국 축구는 히딩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그는 그때까지는 생소했던 피지컬 트레이너, 비디오 분석관, 언론 담당관 같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시스템으로 2002년을 역사책에 밀어넣었다. 그 이후 이제는 웬만한 프로구단도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수많은 경질 파문에 따라 대표팀의 형식적 시스템은 구축되었으나 그 내실이 여의치 않고 축적된 정보나 노하우가 새 팀의 자산이 되지는 못했다. 홍명보 감독은 선수와 전문가들이 결합된 ‘하나의 팀’을 구축해야 하고 이 힘으로 브라질의 승전보와 그 이후의 축구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주변의 유혹을 거절해야 한다. 이는 경기 외적인 당부다. 항간에는 여전히 한국 축구에 인맥, 학연이 작동한다고 하지만 적어도 대표팀을 구성하는 데 있어 그런 폐단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과 2002 월드컵을 계기로 사라졌다고 나는 판단한다. 프로축구의 활성화에 따라 축구로 유명한 대학은커녕 고교도 거치지 않고 프로 무대로 직행하는 스타들이 늘고 있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경기 외적인 유혹이다. 나는 역대 대표팀 감독 중에서 딕 아드보카트 감독을 최악으로 꼽는다. 그는 이재에 밝았다. 2002 월드컵의 엄청난 영향력, 그러니까 축구대표팀과 그 감독이라는 엄청난 ‘브랜드 효과’에 놀란 기업들은 2006 월드컵의 아드보카트 감독을 ‘제2의 히딩크’처럼 띄웠다. 굴지의 전자회사와 카드회사의 모델까지 한 아드보카트 감독은 순전히 한국에서만 출간된 자서전까지 남기고 그 어떤 흔적도 없이 떠나버렸다. 아마도 많은 기업들은 홍명보라는 이름의 브랜드 가치를 분주히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 축구의 레전드, 올림픽 동메달의 상징, 든든한 멘토이자 맏형 등의 광휘를 지닌 ‘홍명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엄청난 광고 효과를 지니고 있다. 그가 모든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겠지만 ‘대표팀 감독’의 품격에 맞는 절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2006년 현대카드 광고
고대 로마 시절, 원정에서 승전보를 들고 장군이 개선할 때 반드시 ‘메멘토 모리’를 반복해서 말하는 하인이 있었다. 모두가 영웅으로 칭송하며 환호할 때 그 하인은 “장군도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죽음’이란 반드시 자연사적인 운명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패배와 시련도 포함한다. 그러한 각오, 그러한 자세, 그러한 눈빛으로 모든 것을 원점에서 새로 시작할 때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그야말로 올림픽 동메달은 어제 내린 눈일 뿐이다. 모든 게 원점에서 시작돼야 한다. 사실상 그렇지 않아도 원점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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