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양승태 사법농단’ 수사 4개월여 만에 첫 구속자가 나왔다. 지난 27일 수감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다. 임 전 차장은 재판거래, 법관 사찰, 검찰·헌법재판소 기밀유출 등 대부분의 사법농단 의혹 사안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인사다. 구속영장에 기재된 개별 범죄사실만 30개 항목에 이른다. 전·현직 법관들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조차 90%가량 기각해오던 법원이 임 전 차장 구속수사를 허용한 것은 의미가 크다. 사법농단이 도덕적·윤리적 사안을 넘어 실정법 위반 행위임을 법원에서 인정했다는 뜻이 된다.

임 전 차장 측은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서 사실관계를 대부분 인정하면서도 “징계 대상이 될지는 모르나, 형사처벌 받을 일은 아니다”라는 방어논리를 폈다고 한다.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 임민성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범죄사실 중 상당한 부분에 대해 소명이 있고, 피의자의 지위 및 역할, 현재까지 수집된 증거자료, 수사 경과 등에 비춰볼 때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며 영장을 발부했다. 임 전 차장이 관여한 사법농단이 법관으로서 부적절한 행위일 뿐 아니라 ‘범죄’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사법농단 의혹의 핵심 피의자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구속된 다음날인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를 받기 위해 이송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사법농단의 ‘실무총책’이 구속된 만큼, 이제 관심은 그 윗선으로 쏠린다. 검찰은 임 전 차장의 영장에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 등을 공범으로 적시한 바 있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른 만큼 ‘몸통’ 수사에 속도를 내야 한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압수수색 시도가 좌절되면서 상당수 증거가 인멸됐을 가능성이 크다. 임 전 차장의 변호인도 “부당한 구속이기 때문에 검찰 수사에 일체 협조할 수 없다”고 밝힌 터다. 하지만 차관급 법관 한 사람 선에서 헌정질서를 뒤흔드는 사법농단이 자행됐다면 누가 믿겠는가. 검찰이 실체적 진실 규명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법원이 임 전 차장 구속수사를 허용한 배경을 두고 다양한 관측이 나오는 모양이다. 잇단 압수수색영장 기각에 이어 임 전 차장의 구속영장마저 기각할 경우, 사법농단 특별재판부 도입을 저지할 명분이 사라진다는 위기의식이 작동했다는 설이 그 하나다. 임 전 차장 선에서 ‘꼬리 자르기’ 하려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이 모든 정치적 해석이 억측이기를 바란다. 법원이 사실과 증거 앞에 겸허할 때 사법신뢰 회복의 길이 열릴 것이다.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