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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일곱 개의 대륙, 하나의 지구> 영상 캡처

드넓은 세상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어떤 비상구를 통해 어디로 달아나는가. 지금 산꼭대기에서 사진 찍는 사람은 무한창공으로 떠나는 자신의 모습을 붙드는 중이다. 한 물리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 세상을 때리고 나간 빛은 우주 한구석에 습자지처럼 쌓여 있다고 한다. 그 빛의 끈을 발견하여 가져온다면 지상에서 벌어졌던 일을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실현할 수 없는 건 상상하지도 않는다는 말에 기댄다면 이는 전혀 허무맹랑하지도 않을 일!

감쪽같은 시간에 운반되어 가는 세월이 참 빠르다. 같은 시월에 속하건만 올해 추석도 벌써 까마득한 일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라도 기록하지 않으면 그때의 일은 흐지부지 없었던 일이 되고 마는 것. 재난 탈출의 새로운 문법을 제시한 영화 <엑시트>와 다큐 <일곱 개의 대륙, 하나의 지구>의 한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허드슨만의 한 바닷가에서 북극곰 한 마리가 헤엄친다. 어렵게 바위에 간신히 몸을 얹은 곰. 내 빈약한 어휘로 그저 시퍼런 감빛이라고 겨우 표현할 수밖에 없는 바닷물이 사방에 넘실댄다. ‘천지현황 우주홍황’이라고 할 때의 그 가물가물한 ‘검음’이 이 물빛과 같을까. 생생하게 전해지는 정밀한 고독 속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곰.

토함산을 탐사하고 내려오던 어느 날. 기세 좋던 햇빛도 기울어 꽃들과 작별하고 골짜기를 벗어나 동무들과 헤어져 몇 개의 문을 통과하니 문득 신경주역 플랫홈의 맨끝이다. 낯선 고장에 낯선 시간. 먼 산이 방금 다녀온 토함산의 동생들처럼 늘어서 있고 사방이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일이 곧 일어날 것만 같은 충동으로 가득한 철길. 그 순간 문득 적막함을 가르며 기차가 나타났던가. 곰의 고독에 그때의 그것을 포개며 강릉 교동 한과를 입에 넣고 우물거릴 때, 놀랍게도 흰고래 떼가 허드슨만을 찾는다, 기다리던 곰이 그 육중한 몸을 물총새처럼 날리더니 고래의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곰이 고래를 포식하는 동안 다시 돌연한 정적이 찾아오고 들리는 건 오로지 출렁이는 물결 소리. 그것은 벌겋게 번져나오는 고래의 핏물을 말끔히 닦아내는 바다의 작업이었던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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