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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 시작되자마자 일주일간 중국 산둥성 지난(濟南)에 여행을 다녀왔다. 지난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도시다.
산둥성은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몸통이며 지난은 산둥성의 성도(省都)다. 나는 고대 중국의 제나라를 좋아하는데 춘추오패 중 문화가 가장 꽃피었던 나라이기 때문이다. 강태공(姜太公)이 품격을 기초한 나라, 맹자와 직하학궁이 학문을 논하던 곳, 도교와 양생술이 어느 곳보다 번성했던 고장이다. 학자들이 모여들어 마치 고대 아테네를 방불케 했던 직하학궁은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에 있었다. 임치의 남문인 직문(稷門) 아래에 초빙한 학자의 집을 짓게 했으므로 직하학궁이라 불렀다. 임치는 지금의 쯔보(淄博)시 린쯔구로 지난시와 30분 거리다.
지난에서 동쪽으로 올수록 우리와의 친연성도 많이 발견되는데 온돌 유적도 발견되었고, 동래(東萊)라는 지명은 부산의 동래와 한자가 같다. 고대 산둥반도에서 핍박을 피해 한반도로 건너간 이도 많다고 한다.
평소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는 중국문학 번역가와 동행이 되었다. 호텔이 아니라 에어비앤비로 일반 가정집 아파트를 숙소로 잡았기 때문에 이곳의 일상을 더 공유하는 기분이었다. 나로선 중국 일반인 가정 내부를 처음 접하는지라 신기했다.
볶음 요리가 많은 중국답게 주방엔 볼이 깊은 냄비가 많았고 가스레인지 화구도 커서 식당처럼 화력이 대단했다. 그 대신 보일러의 화력이 미지근했다. 반신욕을 위해 큰 들통에 물을 데워야 했는데 금방 펄펄 끓었다. 그걸 들고 낑낑대며 욕조로 옮기는 동안 잘못 물이 넘쳐 화상을 입을까 노심초사해야 했다. 거실 벽은 기복신앙이 점령하고 있었고, ‘제심(齊心)’이라고 크게 써 붙인 서예가 인상적이었다. 다탁 위에 꽃차가 보이기에 한 잔 마시기로 했다. 그런데 몇 송이를 컵에 옮기고 물을 붓다가 컵이 아니라 차통에 찔끔 부어버리고 말았다. 너무 놀라 급히 꽃들을 쏟아내고 말리느라 난리를 쳤다. 저녁엔 맵게 조미하여 압착 포장해서 파는 돼지껍데기 안주를 사와서 맥주를 마셨다.
그날 본 것들, 이를테면 지난에는 왜 이리 외국인이 코빼기도 안 보이냐, 사람들 표정과 행동이 억세지 않고 편안하다, 내일은 민물가재(龍蝦) 요리를 먹자 등의 얘기를 나눴다. 휴대폰을 열어 한국의 미투 뉴스도 넘겨보았다. 한국 사회가 이번엔 정말 바뀌긴 하겠구나 하는 반가운 마음도 들었고, 남성으로서 익숙한 껍질이 깨지는 아픔과 곤혹스러움도 느꼈다. 이불을 덮고 누우니 이 공간을 사용하는 중국인의 자아와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체취도 났다. 이불과 베개에서 모락모락 올라왔다. 약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곧 잠이 들었다. 이것저것 따지기엔 너무 많이 걸어다녔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훈툰이라 불리는 중국식 만둣국을 끓여 먹었다. 간편식인데, 물에 만두와 수프를 넣으면 맑게 끓여진다. 이거 참 해장도 되고 좋더라. 일주일간 줄기차게 먹었는데도 질리지 않았다. 물론 훈툰이 훌륭해서라기보다는 우리가 무난해서였을 것 같다.
지난 시내는 여느 중국 도시처럼 복잡 화려했다. 제나라는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곳곳마다 무슨 광장이라는 이름의 복합 쇼핑몰이 우주선이 지구에 잠시 왔다가 눌러앉은 것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의 스타벅스에 가서 잠시 다리를 쉬다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층층마다 돌아다녔다. 책이 꽂힌 서가를 메인 디자인 요소로 활용한 훠궈(중국식 샤브샤브) 전문점을 보았다. 책을 머리 위에 두고 사람들이 열심히 먹고 있는 모습이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약간의 부조화 정도야 가볍게 무시하는 듯한 중국식 표현이 귀엽게 다가오기도 했다.
우리는 지난의 서점들을 나름의 지도를 그려가며 열심히 찾아다녔다. 서점 주인에게 왜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 장사는 잘되는지 염치불고하고 물어보기도 했다. 중국에도 독립서점 열풍이 불어 많이 생겼다가 역시 많이 문을 닫았다고 해서 동병상련이 느껴졌다. 나는 중국에 번역 소개된 해외도서를 주로 살펴보았다. 중국의 해외도서 번역 속도는 한국을 예전에 앞질렀다. 우리가 놓친 좋은 책이 뭐가 있나, 요리조리 사실 눈이 빠지게 찾다보니 시간이 금세 흘러간다. 안 되는 중국어로 더듬더듬 읽어보다가 이거다 싶으면 동행의 해설을 청하여 국내에 꼭 소개해보고 싶은 책 두 권을 구해왔다.
제수(濟水)의 남쪽을 줄여 제남, 중국어 발음으로 지난으로 읽는 고도(古都)는 자신이 감춘 역사의 흔적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은 다음을 기약한다.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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