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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는 탄탄한 줄거리에 이끌려보고 어떤 영화는 분위기에 매료되어 젖어들고 또다른 영화는 배우들의 신들린 연기나 시같은 대사에 감탄하며 본다. 1998년에 만들어졌지만 최근에 소수의 극장에서 상영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는 보는 내내 영화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하게 만든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 질문은 계속된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 스틸 이미지

“내 인생에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단 하나의 추억은 무얼까...”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저승으로 가기 전에 ‘림보’란 지역에서 일주일 동안 머문다. 이곳의 직원들은 이들에게 3일 동안 자신의 인생에서 저승까지 가져가고 싶은 추억 하나를 기억해 내라는 질문을 던지고 직원들은 4일동안 그들의 추억을 짧은 영화로 재현해줘 오직 그 추억, 아름답고 영원히 함께 할 ‘작품’ 하나만 품고 천국으로 떠난다는 것이다.

극중에 등장한 인물들은 10대 소녀에서 90에 가까운 치매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연령도 다양하고 직업도 다르다. 지방의 연수원같이 건조한 풍경의 림보에서 세상을 떠난 자들은 자신의 과거 삶을 반추해본다. 그런데 쉽게 “이거에요”라고 추억 한 가지를 빨리 고르는 이는 드물다. 70대의 아저씨는 도무지 뭘 선택할지 모르겠다며 70여년간의 삶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기도 한다.

결국 사람들이 선택한 것은 아주 소소하고 확실한 기쁨의 순간들이다. 엄마의 무릎에서 낮잠자다가 설핏 깨었을 때 엄마가 볼을 쓰다듬으며 사랑스런 눈빛으로 봐주던 순간, 친구의 빨간 원피스를 부러워하자 극진히 동생을 사랑한 오빠가 시내를 뒤져 비슷한 원피스를 사와 신나게 춤을 추던 때, 그리고 맞선으로 만나 뜨거운 정은 없이 살았던 부인이 정년 퇴직 후 함께 영화를 본 후 벤치에 앉아 “당신과 같이 극장에서 영화봐서 너무 좋아요”라고 행복한 표정을 보이던 순간 등 아주 평범한 일상의 순간들이다.

수많은 명사들을 인터뷰할 때도 비슷했다. 대통령, 대학총장, 장관, 예술가 등등에게 ‘제일 행복한 순간은 언제였냐’고 물어보면 신기하게도 찬란한 영광이나 엄청난 행운울 누리던 순간이 아니라 가난과 고생과 어려움이 많았던 때를 떠올렸다. “어떻든 많은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고싶은 어머니가 식은 밥에 신김치와 멸치를 넣고 한참 끓이면 푹 퍼져 김치죽같았는데 그땐 왜그리 꿀맛이었는지요. 우릴 보며 눈에는 눈물이 살짝 비치는데 입은 웃던 어머니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담임선생님이 수업료를 제때 못내는 저를 불러 연필과 공책을 주시면서 ‘넌 똑똑하고 성실하니 꼭 성공할거라고 믿는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죠. 그 손길이 얼마나 따뜻하던지요” 등의 추억을 전했다.

영화에서 일주일 동안 자신의 생애에서 한가지 가져가고 싶은 추억을 기억해내지 못한 이들은 저승에 가지 못하고 림보의 직원으로 남아 끝없이 다른 이들에게 질문을 한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추억은 무엇이냐고.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 질문을 던지는 징벌을 받는 셈이다. 자신은 정작 그 질문에 해답을 찾지 못해서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곰곰히 떠올려도 하나를 선택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삶에 충실하지 않았거나 혹은 행복감을 못느끼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무사히 저승에 가지 못할까봐 나도 그동안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내가 사랑받고 인정받는 느낌으로 가슴이 따사로와지던 때, 온통 주변이 꽃처럼 피어나던 때를 떠올려봤다.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것도 없지만 나 역시 ‘절정’의 순간이 아니라 감사한 마음이 충만할 때였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 엄마가 직접 수를 놓아 만들어주신 헝겊가방을 받았을 때,  딸아이가 정류장에서 퇴근하는 날 기다렸다가 꼬마칠판에 쓴 ‘엄마 사랑해’란 삐뚤빼뚤한 글씨를 보던 순간, 가족여행가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골목길을 걷던 순간들…. 그런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미세먼지가 제거되고 마음의 하늘이라도 청명해지는 느낌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란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은 현재의 불행함에 안주하려는 여자주인공에게 “사랑을 스쳐지나간 죄, 행복해야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칭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을 사형에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형’을 선고합니다”라고 말한다.

사랑과 행복을 못느끼면 살아서는 고독형, 그리고 죽어서는 저승에도 못가고 계속 망자들에게 “당신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였나요”를 물어야한다. 그리고 그건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내리는 벌인 셈이다. 행복에 둔감한 게 죄라서다.

<유인경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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