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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생전에 프랑스 언론과 가진 한 대담에서 “책은 그 자체로 완성된 발명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망치, 수레바퀴, 가위가 그렇듯이 더 이상 개선할 필요가 없는, 오래전에 발명이 끝난 도구라는 얘기다. 확실히 책은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에 수명이 길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수많은 기능을 가진 도구들을 닮았다. 나는 언제나 좋은 도구란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확장성이 큰 것들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망치는 쇠뭉치에 손잡이를 박아 넣은 것에 불과하지만, 못을 박고 단단한 것을 깨트리고 쭈그러진 것을 펴는 등 그 모든 일에 쓴다. 책은 종이에 글자들을 박아서 묶은 것에 불과하지만, 단순한 기록과 보존을 넘어 뭔가를 알리고 검색하고 참조하고 공감하고 또 빈 시간을 때우는 용도로 쓰인다. 심지어 책은 유사시에 불을 때고 베개 대용으로 쓰거나 화장실에 들고 들어갈 수도 있다. 나는 아침마다 화장실에 앉아 책을 읽곤 하는데, 변기 위에서 함께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책 읽는 것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책이 이렇게 쓰임새 많고 수명이 긴 이유에 대해 에코는 한마디로 “책이 생물학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책을 읽는 행위는 우리 눈과 손의 기능과 맞닿아 있고, 따라서 몸과 즉각적인 관계를 맺는 소통기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번 익힌 기술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에코는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이 나올 때마다 많은 이들이 책의 쇠락에 대해 우려했지만 책은 살아남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1950년대 헤르만 헤세가 예언한 것처럼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가와 대중교육 등의 필요는 새로운 발명품들에 의해 충족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수록 책은 더욱 그 존엄과 권위를 되찾게 될 것이다.”

어쨌든 책이 살아남을 거라는 데 대해 부정할 사람은 없는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살아남느냐에 있다. 헤세가 말한 것처럼 과연 책이 새로운 매체들의 등장으로 인해 더욱 존엄과 권위를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책은 여전히 살아남아 있지만, 그 기능 대부분을 다른 매체들에 양보한 채 앙상하게 살아남은 듯 보이기 때문이다. 책이 지식의 전달, 정보 검색, 여가 충족 등의 전통적 기능을 인터넷 플랫폼에 넘겨주면서 결국 소수의 기호품으로 남으리라는 전망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책의 역할은 어떻게 남을까?

2015년 기준 우리나라의 국민독서율, 즉 1년에 책을 한 권 이상 읽는 사람의 비율이 65%라고 한다. 35%는 전혀 읽지 않았다는 얘기다.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도 책 읽는 친구를 두고 왜 책을 보느냐고 놀리거나 잘난 척한다며 왕따를 시키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학생부터 성인까지 책 안 읽는 우리 사회의 실태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는 터라 새삼 근엄한 태도로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유례없이 긴 근무시간과 강도, 학생들의 학습 경쟁 등이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책 안 읽는 것을 개인의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 읽는 것이 안 읽는 것보다 어쨌든 좋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책 읽기에 접근하는 시각을 이제는 달리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의무와 강제와 독려로 접근했던 지금까지의 방식은 모두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말이다.

책 읽기는 하나의 특수한 기술이고 능력임을 인정하는 데서 다시 출발하자고 말하고 싶다. 에코가 말했듯이 책이 더 이상의 개선이 필요 없는 단순한 발명품이라면, 그다음에 필요한 것은 그 기능을 잘 쓸 수 있는 기술이다. 우리는 글을 읽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구나 마음먹기만 하면 책을 읽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책 읽기는 망치나 대패를 쓰는 일처럼 오래 익히고 연습해야 하는 기술이다. 더구나 책이 담은 복잡한 의미연관과 미지의 경험 세계는 그것에 접근하려고 머리를 싸매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지난한 도전과제이다.

책이 앞으로도 살아남을까 하는 처음의 질문에 대해서 답한다면, 책이라는 도구를 쓸 줄 아는 사람이 있는 한 그럴 것이라는 뻔한 답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책 읽는 경험 또는 능력을 습득하도록 사회가 전방위적으로 애쓰지 않는다면, 이 능력은 희귀한 기술로 남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될지도 모른다. 서점이나 도서관을 늘리고 지원하는 일만큼이나 앞서서 해야 할 일은 책 읽는 경험의 회복이다. 어려운 일이고 오래 걸리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 핸드백에 언제나 책 한 권이 들어있고, 지하철에 앉으면 책부터 펼치고, 화장실에 갈 때마다 책 들고 가는 풍경을 떠올리는 게 그다지 꿈은 아니지 않은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들 그랬으니까 말이다.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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