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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791년 프랑스. “여성은 자유롭게, 그리고 권리에서 남성과 평등하게 태어나며 그렇게 존속한다.” 올랭프 드 구즈는 ‘여성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한다.

프랑스 대혁명이 내건 자유와 인권은 남성들의 몫이었고,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났다’지만 인간은 남성만을 의미했다. 그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여성의 관점으로 비판하고 보충한다.

“여성이 단두대에 올라갈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연단에 올라갈 권리도 가져야 한다”는 그 유명한 10항은 시민으로서 여성의 동등한 권리와 참여를 요구한 것이었다. 1793년, 자신의 말이 예언이라도 된 듯, ‘성별에 적합한 덕성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비난받고 단두대에 오른다.

세계여성의날인 3월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여성 노동계가 주최한 조기퇴근 시위 ‘3시 스톱(STOP)’에 참가한 여성 노동자들이 ‘유리천장 아웃(OUT)’이 적힌 우산을 들고 성평등 정책을 촉구하고 있다. 박민규 기자

#2. 1792년 영국. “여성이 처한 비굴한 의존 상태를 위장하기 위해 남성이 선심 쓰듯 내뱉는 귀엽고 여성스러운 어구들과, 여성의 성적 특징으로 간주되어 온 나약하고 부드러운 정신, 예민한 감성, 유순한 행동거지 등을 거부하고, 아름다움보다 덕성이 낫다는 걸 밝히려 한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권리 옹호’를 발표한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에 불과하고 어떠한 경제적, 정치적 권리도 갖지 못하던 당시, 인간은 동등한 이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성별에 따른 불평등한 교육과 편견체계 아래서 다르게 형성되어 간다고 지적하고, 인간으로서 여성의 권리를 요구한 그의 주장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여성이 인간 대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던 그의 소원은 다가올 여성들의 오랜 투쟁을 예고했다.

#3. 1898년 조선. “슬프다! 전날을 생각하면 사나이의 위력으로 여편네를 누르고, 구설을 핑계로 여자는 안에 머물면서 밖의 일을 말하지 않고, 오로지 밥하고 옷 짓는 것만 하리오. 어찌하여 신체와 수족과 이목이 남자와 다름없는 사람으로 규방에 갇혀 밥과 술만 지으리오.”

이소사와 김소사는 ‘여권통문’을 발표한다.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라 선언하고 평등한 교육권과 노동권, 경제권을 강조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 선언문이었다. 이들은 여권통문 발표 이후 서민층 부녀와 기생들, 지방의 부인들과 함께 최초의 근대적 여성단체인 ‘찬양회’를 조직하고 여성 교육권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노력한다. 고종황제에게 상소문까지 올렸지만 관립여학교는 설치되지 않는다.

#4. 1927년, 일제강점기 조선. “조선에 있어서는 여성의 지위가 한층 저열하다. 미처 청산되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이 오히려 유력하게 남아 있는 그 위에 현대적 고통이 겹겹이 가하여졌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사업을 전개하려 하는 것을 선언하나니 우리의 앞길이 여하히 험악할지라도 우리는 일천만 자매의 힘으로써 우리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 강당에서 항일여성운동단체 ‘근우회’가 발족한다.

김활란·유각경·정종명·황신덕·주세죽·허정숙·정칠성 등 당대 자각한 여성들이 총망라되었고 회원 150여명, 방청인 1000여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 차별 철폐,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조혼폐지와 결혼의 자유, 인신매매 및 공창제 폐지, 농촌 여성의 경제적 이익 옹호, 여성 노동자에 대한 임금 차별 철폐 및 산전·산후 임금 지불, 부인과 소년공의 위험 노동 및 야근 폐지’ 등을 담은 행동강령은 당시로서도 획기적이었지만 아직도 대부분 실현되지 않은 주장들이다.

# 2017년 대한민국. 여성이 성적 대상, 가정부, 장식물, 보조적 존재, 재생산의 도구였던 시대에서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독립이 오고, 전쟁이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실현되며, 분배정의가 이루어지면 진정한 여성해방이 올 것인가.

여성들은 여전히 길거리에 앉아 있고 피켓을 들고, 집회를 하고 목이 터져라 성명서를 발표한다. 평등한 법과 제도를 만들기 위해, 법적 이중 잣대를 비판하기 위해, 불평등과 차별 해소를 위해, 재생산의 권리를 위해, 평등한 노동권을 위해, 임금격차 해소를 위해, 성폭력에 반대하기 위해, 성착취적 산업과 성구매를 비판하기 위해, 피해자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름 없이 죽어간 여성들을 추모하기 위해.

“여성은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라.” 90여년 전 근우회 창립 선언문은 슬프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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